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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Jan 10. 2019

Long Distance



먼지 쌓인 도서관에서 논문을 써내려 가다 문득 네가 궁금해졌다. 미처 읽지 못한 책이 잔뜩 쌓인 책상에서 조심스레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학교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걸터앉은 뒤 영상전화를 걸었다. 파리는 환한 오후의 중간이었고 서울은 기나긴 하루의 일과 끝에 모두가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너는 퇴근 후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던 탓에 어느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전화를 받았다. 순간 주변에서 부러움 섞인 야유가 들려왔다. 화면 너머로 친구들을 하나씩 소개해줬다. 짧은 인사 후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는다며 식당 밖으로 나와  나의 안부를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전화를 끊고 텅 빈 복도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해의 그림자가 이만큼이나 길어졌다는 것을 보고서야 지나간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후 몇 개의 계절이 지났다. 한 학기 동안 준비한 발표를 마치고 강의실 문을 힘겹게 밀고 나왔다. 허탈한 마음과 피로가 동시에 밀려들어  학교 내의 카페로 곧장 가 오십 센트의 고소한 우유가 일품인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원두찌꺼기를 털어내는 쇠뭉치의 둔탁한 소리에 이어 커피를 추출하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기다리는 동안 두꺼운 코트에서 전화기를 꺼내어 습관처럼 확인했다. 별다른 연락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고민하다 이내 관두었다. 그 사이에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들고 학교 정원으로 나오니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파리는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다. 햇살을 가득히 머금었던 학교의 정원은 어느새 싱그러움을 다 잃었고 그 상실 위로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거리의 유독 화려한 장식들은 해도 잘 뜨지 않는 파리의 겨울을 애써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노력처럼 느껴졌다. 그러기에 이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유명해졌을 거라는 혼자만의 결론을 내린다. 산타 할아버지가 파리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이들을 위해 어디선가 몰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은 커피를 마저 털어 넣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런 연락은 없었다. 코트 안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뒤 강의실로 돌아갔다. 여전히 발표가 진행 중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노트를 폈다. 해가 바뀐 지난주. 올해 해야 할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을 적어 두었다. 나열된 것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우선순위를 매겼다.

저녁식사시간이 한참이 지나서야 모든 발표가 끝났다. 발표를 위해 전시해 둔 것들을 정리하고 급하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집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굶주림보다 부족한 수면 욕구가 더 강했던 탓에 자연스레 식당 대신 집으로 향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이 열렸다 닫히는 지하철을 타고 파리의 땅 아래를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터지지도 않는 지하에서 물끄러미 전화기를 쳐다봤다. 바쁘게 지내는 일상 속에서는 괜찮은가 싶다가도 지하철만 타면 유독 머릿속의 잔상이 짙어졌다. 우리가 처음 함께 머물렀던 호텔이 있던 역을 지나기 때문일까. 나는 어쩌자고 그 역을 지나야 만 하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일까. 몇 줄의 안부를 썼다 지웠다. 유치한 안부라도 무심히 건네어 볼까 싶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억지로 전화기의 전원을 껐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에 내리는 정류장보다 몇 정거장 앞서 내렸다. 그리고 한 겨울의 밤거리를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걷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지쳐 잠드는 일조차도 버거울 테니 조금 걷고 나면 아마도 뒤척이는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될 테니깐. 아직 거리 곳곳에는 연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그 남은 장식마저 다 사라질 것이다.


발이 시리다 못해 아파 올 때쯤 집에 도착하였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늘한 집의 온도가 가장 먼저 반긴다. 전등을 켜고 초에 불을 붙인다. 난방을 켠 뒤 적막을 깨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별 거 없지만 그 중 그나마 손이 가는 것을 꺼내어 데웠다. 그 사이 뜨거운 물을 끓이고 스리랑카에서 사 왔다며 선물 받은 블랙티를 빈 컵 속에 다 던져 넣었다. 그 후 거실의 자그마한 소파에 웅크리듯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한국은 아침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아침잠이 많은 네가 힘겹게 일어날 것이 떠올랐다.


데워진 음식이 많진 않았지만 그마저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우려낸 차를 손에 쥐고 침대 비스듬히 앉았다. 떠오르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다. 마시던 차를 침대 옆 탁자에 두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밖에서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가, 사고가 날 것 같은 오토바이 소리가,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예민하게 들려왔다. 어느 순간 잠에 들었고 눈을 뜨니 두꺼운 커튼 틈으로 햇볕이 기어들어와 침대의 둥근 모퉁이에 진득이 묻어 있었다. 


단지 몇 개의 계절이 지난 어느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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