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보통날
신체 중 날이 추워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인지하는 것은 나의 피부이다. 푸석푸석한 피부는 차가운 계절이 찾아오게 되면 더욱 메마른 탓에 보습제를 아침저녁으로 꼬박 챙겨 바른다. 강한 햇빛이 내려 쬐는 여름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것을 등한시하니 그 덕에 피부는 쉽게 그을리고 잡티가 생겼다. 머리카락은 얇은 편이라 조금만 길어도 잘 헝클어지는 탓에 옷을 깔끔하게 입어도 촌스러운 티를 감출 수가 없다.
단순히 버짐이 피거나 피부의 갈라짐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그마한 것에 스쳐도 쉽게 생채기가 났고 혹여 씻고 난 후 보습제 바르는 일을 잊고 잠에 들면 피부가 따가워 새벽에 잠을 깨곤 한다. 특히 몸이 유연하지 못한 탓에 손이 잘 닿지 않는 등 같은 부분은 더욱 심각하다. 참다못해 바닥에 비닐을 펼치고 보습제를 그 위에 넓게 펴 등에 묻혀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자괴감뿐이었다. 누구에게라도 부탁하면 되지만 프랑스에서 살며 혼자서 여러 해의 겨울을 보내고 있으니 그러기도 애매하였다. 그리하여 추워진 계절이 어서 지나가기를.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니 조금은 더디게 흐르고 아프지 않길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으로.
평소 강아지를 좋아해 친구의 집을 자주 찾는다. 친구의 반려견을 가끔 돌보는 것으로 한국에 있는 반려견의 그리움을 대신한다. 오래간만에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한 날. 잠옷을 입고 강아지와 놀다 그 자그마한 발톱에 생채기가 났다. 상처가 작았던 탓에 물이 닿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집에 돌아온 뒤 약을 바르기 위해 비상약을 모아둔 흰 서랍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사용하였는 게 언제인지도 가물한 서랍이었다. 서랍 틈으로 먼지가 소복이 쌓인 먼지는 지나쳐온 시간들을 말하고 있었다. 열어 보니 처음 눈에 띄는 것은 검은색 비닐봉지.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곳엔 검은 비닐봉지로 둘둘 감아둔 약봉지 다발이 있었다. 한 때 잠이 오지 않아 처방 받아 복용후 남은 조금의 약. 몇 개월 동안은 이 약이 없으면 잠에 드는 일이 굉장히 수고스럽게 느껴질 정도이었다. 정해진 순간은 아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나는 검은 봉지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나 어느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욕실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생기 없어 보이는 얼굴과 탄력 잃은 피부. 푸석한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있고 갈색 눈동자 너머 텅 비어버린 마음이 비쳤다. 따뜻하고 촉촉했던 마음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나의 피부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메말랐으며 트고 쉽게 갈라져 있었을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날카로운 시간들에 베여 너무나 쉽게 생채기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리는 시간에 대해 눈물을 흘렸고 메말라 버린 감정들은 덕지덕지 쌓여 상처들 위로 형편없이 포개어졌다.
누락 없이 반복되는 시간들은 하루의 귀결이 잠을 자는 시간으로 맺어지지 못하였다. 건강은 악순환 속에서 무한반복이 되었고 나는 그 굴레에서 아등바등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편하게 잠에 든다는 것은 내일이 오늘의 연장이 아닌 하루의 시작에 필요한 것이었다. 시작을 한다는 것은 나의 세상이 다시 분홍으로 물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잠을 기다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의 잃어버렸던 시간은 자연스레 다시 나의 것이 되었고 당신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내일의 시간이 기다려졌고 검은 봉지의 든 것은 단순히 잠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마음의 보습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일상에서 조금씩 그 존재가 희미해져갔다.
메마르던 마음이 다시 촉촉해졌을 때쯤
하나의 추운 계절이 지나갔다 생각되었다.
그때의 계절은
어느새 초록 햇살로 거리를 가득 메운 여름 한 복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