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보통날
군생활을 하는 동안 딱딱한 운동화를 신고 매일을 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늘 다짐했던 것은 푹신한 러닝화를 하나 사 신고 달리겠다는 것이었다. 전역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몇 푼 되지 않는 병장의 월급으로 진한 회색의 푹신하고 가벼운 러닝화 한 켤레를 구입했다.
그 이후로 5년. 그 신발을 신고 동네와 여러 공원을 달렸고, 한 달간의 동유럽 배낭여행 내내 함께하였다. 다소 험한 순간들을 보냈던 탓인지 몇 없는 신발 중 가장 빨리 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난 구멍 사이로 새끼발가락을 내놓고 다녔지만 괜한 정 때문인지 쉬이 버리지 못하다 최근 이사를 하며 큰 맘먹고 정리하게 되었다. 그런 회색의 러닝화만큼 잘 신고 다닌 검은색 구두 한 켤레가 있다.
며칠 전부터 구두를 신은 날이면 발이 아팠다. 정확히 말하면 뒤꿈치에 통증이 느껴졌는데 구두굽이 꽤 닳은 탓이었다. 걷는 자세가 이상하다 생각한 적은 없으나 닳은 구두굽의 모양을 보면 안쪽보다 바깥쪽이 훨씬 마모되어 있었다. 걸을 때 기울어지는 굽으로 인한 통증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가진 단 한 켤레의 구두였다.
매장에 가서 몇 켤레의 새 구두를 신어 보았다. 신어 본 구두는 광택이 났고 훨씬 좋은 가죽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가질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구두 가죽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핑계로 닳은 굽을 수선 해 신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수선을 위해 택배를 보내려고 신문지에 감아 둔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기 시작한 지 3년 정도 된 것 같았다. 처음 구두를 사보는 탓에 이 구두 저 구두 신어보며 발에 가장 편한 걸 찾았다. 운동화는 그렇지 않았지만 왠지 구두는 누군가가 골라주었으면 하였다. 넥타이 하나를 고를 때처럼.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런 거에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너의 손을 꼭 잡고 매장으로 갔었다.
꽃길만 걷길 바라며 산 구두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꼭 신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일에는 늘 너의 곁에 서있었다. 돌이켜 보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들은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을 만큼이나 특별한 나날들이었다.
가만히 집에만 있지 못하는 병으로 떠난 여행은 한 켤레의 신발에 괜한 추억들을 걸어 두는 버릇을 주었다. 그렇게 생겨버린 정을 지우지 못하는 모자람 때문에 새로운 구두에게 조차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닳은 구두의 굽처럼 마음의 한편이 저렇게 꼭 닳은 걸까.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것일까. 은연중 떠오르는 추억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여전히 아린 것인지도.
며칠 후. 구두 수선이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를 끊고 창 밖의 꽤나 포근해진 날을 바라보니 곧 봄이 올 것 같다.
그 봄날, 고친 구두를 신고 서게 될 나와 그 곁을 조심스레 그려보았다.
올 봄도 벚꽃은 흩날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