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보통날
오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한국의 연휴기간에 온 탓에 여행객들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여행의 피로 탓에 얼른 자리에 앉아 눈을 잠시나마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피곤한 탓 인지 눈을 감았지만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입국신고서를 나눠주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란히 앉은 사람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의 옆 쪽, 창가 자리에는 자그마한 체격의 그녀가 앉아 있었다. 기내로 들어올 때부터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국적의 사람이라 생각했나 보다. 신고서를 받아주며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말에 짧은 일본어로 이야기하니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신단다.
서로 이해하기 편하게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은 짧은 문장과 단어들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히마와리(ヒマワリ). 사는 곳은 오사카 근처. 한국에 가는 짐이나 읽고 있던 책으로 보았을 때 단순한 여행은 아닌 듯싶었다.
“한국에 일이 있으신가 봐요?”
“아니에요. 여행 같은 거예요.”
“여행 같은 거?”
“한국인 남자 친구가 있어 그를 보러 가요.”
“아, 정말요? 오랜만에 그를 보는 거 겠어요.”
“네! 3달 만에 보는 거예요!”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네… 좋아요. 여행도 가기로 했어요. 직장인 이세요?”
“아니요. 저는 대학원에 있어요. 좋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남자 친구랑 여행이라. 어디에 가요?”
“하하.. 경주에 가기로 했어요. 그리고 서울도 갈 거 에요.”
경주를 전부터 가고 싶었다고. 그 말을 남자 친구에게 하니 이번에 시간을 맞추어서 한국을 같이 여행하자 제안을 하였고 그래서 이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오사카보다 날씨가 선선하고 시원해 이 곳 저곳 돌아보기 편할 꺼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은 곳이고 경주에 이런저런 추억이 많다고. 그래서 교토와 비슷한 경주를 자주 간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말들은 그녀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어는 남자 친구랑 만나면서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네. 한국어 너무 어려워요.”
“그럼 남자 친구가 일본어를 잘하나 봐요.”
“아니요. 아니요”
“네? 그럼 뭐로 이야기를 나눠요?”
“제가 한국어로 말해요.”
“아, 그럼 너무 답답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제가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돼요.”
“그럼, 남자 친구 어디서 처음 만났어요?”
“부산 여행 중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뒤로 계속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예요?”
“네. 3달 전에 온 게 그 부산여행이였어요.”
“운명같은 여행이었네요. 그 여행… "
"네... 운명...하하"
순간 그녀의 얼굴을 조금 붉어졌고 수줍어 하였다. 어려운 연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누구보다 더 행복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아, 히마와리 상. 이름의 뜻이 뭐예요?”
“히마와리(ヒマワリ), 일본말로 해바라기 에요.”
그래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구나. 운명 같은 만남이었고 히마와리, 본인의 이름 같은 사랑을 하는 그녀였다. 아무리 체격이 작은 그녀지만 얼핏 보아도 대학생 정도의 나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지금의 연애가 마냥 쉽지만 않을 것이다. 행복한 순간만이 그들을 기다리는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녀이기에, 그녀다운 연애를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나에겐 같은 국적을 가졌어도 쉽지 않았던 장거리 연애이었다. 더군다나 말이 잘 통하지도 않으며 무언가에 모르는 힘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하는 그녀의 수줍은 미소가 나의 마음 한편을 간지럽혔다.
‘장거리 연애가,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노력해요. 내일 당장 못 보게 되더라도 오늘은 힘껏 사랑을 표현해요.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해요.’
내가 일본어를 잘했어도, 그녀가 한국말이 능숙하여도 전하지 못했을 말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짧은 비행이 끝나고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먼저 나온 수화물을 챙기며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었다.
“덕분에 오는 길이 재미있었어요. 히마와리 상의 연애 응원할게요. 조심히 가요.”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 여행의 풍경도, 순간도, 인연도 아닌 그녀의 이름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히마와리(ヒマワリ)’. 해바라기의 꽃 말은 잘 알려진 것처럼 ‘한 사람을 위한 사랑, 기다림’이다. 그래서 해바라기의 가운데가 그렇게 새까맣게 타버린 게 아닐까. 누군가를 향했던 마음이 그 무엇보다 맑으며 고왔는데 오랜 기다림으로 생긴 상처의 자국들처럼.
그래서일까. 길을 거닐다 해바라기를 우연히 만나게 될 때면 예쁘장스러운 그 노란 꽃 잎들이 가련한 그 자국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잘 지내는 척을 해야만 했던 나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렇게 오사카에서 집으로 돌아와 지친 몸 그대로 소파위로 쏟아졌다. 바람소리만 들리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건넨 해바라기 한 송이가 여전히 누군가의 방 한편에 놓아져 있을지 궁금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