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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Nov 17. 2019

분홍빛 하늘

깨어진 사월의 리스본 하늘을 당신에게 보내었다



“혹시 그거 아세요?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하늘빛이 있는데 지금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저 옅은 분홍과 보랏빛 사이의 하늘이에요."







'아.. 몰랐어요...'


 순간 마음 속으로 대답을 해버렸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수차례, 수백 번은 마주 했을 하늘이었는데 유럽에서만 볼 수 있었다니.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끔 파리의 노을을 보며 왜 이리 예쁠까. 예뻐지는 비결이 따로 있을까 간혹 생각 했으나 적당한 이유를 찾기 힘든 터였다. 


해 질 무렵. 바삐 퐁네프 다리를 건너다 단체 여행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얼떨결 듣게 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같이 바라보았다. 여름이 되면 늘 보던 하늘 임에도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니 굳이 참을 필요 없이 그 속에서 자연스레 섞여 수줍은 감탄을 자아냈다.


누군가 그랬다. 이십 년을 한 곳에서 넘게 살아도 매일 다른 하늘이었다고. 바쁘게 살다 보면 하늘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날도 많지만 분명 이곳 또한 날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였다. 고작  년을 살아도   있는 것들이었다.




분홍의 옅음은 굳이 정의하자면 마음의 시작이었다. 노을은  하루가 저물어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지만 분홍은 나에게 마음의 시작이었으니 당신과 같이 맞이할 아득하고 깊은 밤이 기다려진다는 의미로 전해지길 바라였다. 감정이라는 게 꼭 열매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느 순간이 되면 딱 알맞게 익을 때가 있었다. 익은 열매는 향도 좋고 빛깔도 영롱하여 음미하기에 부족함 없다. 그렇게 익은 감정은 사랑이라 동격으로 불릴 만한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신에게 마음에 나눠 주는 건 분명 큰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더군다나 그 마음의 색깔이 분홍빛을 띄고 있는 것이라면 인생에 있어 엄청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가지고 있는 마음은 한정적이어서 조심스레 품고 있다 한쪽을 떼어 나누어주며 그에 상응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버리면 분홍으로 물들었던 것은 조금씩 색이 바래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김없이 이별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리스본을 여행할 때 이야기이다. 그날은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이었으나 머무는 동안 예보된 날씨 중 가장 좋은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의 마무리를 도시와 강,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서 노을과 야경을 보기로 하였다. 이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첫날 밤 반드시 거쳐야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행위이다. 가장 유명한 28번 트램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곳은 언덕 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집 옥상 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노을과 야경을 보기에 무리 없는 날씨였지만 문제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따뜻한 외투 때문에 걱정 없었으나 예기치 못한 더 큰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거치한 후 리스본의 노을을 담았다. 언젠간 이곳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글 뒤에 넣을 요량으로 정성을 들여 찍던 중이었다. 같이 여행을 떠난 친구는 여행을 기록하고자 함께 사진을 찍자 청하였다. 그 찰나의 순간.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얕은 비명을 질렀고 그들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채지 못하였다. 누군가 언덕 아래를 가리켰고 그곳엔 나의 카메라와 렌즈 삼각대가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아뿔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였다. 카메라는 당연히 망가졌음은 물론 누군가의 마당으로 떨어진 것이라 회수하는 것조차 엄두가 안 났다. 잃어버린 카메라 속에는 여행 내내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집주인이 영어가 안되면 어떻게 하지. 혹시 매일 이곳의 관광객들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등 수십 개의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갔다. 집주인은 여행을 떠나고 없었으나 다행히도 옆 집 사람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나와 카메라를 수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되찾은 렌즈와 삼각대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지만 카메라와 메모리 카드는 회수 할 수 있었다.


여행의 중간이었고 렌즈가 고장 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자그마한 단렌즈가 있었으니 사진을 찍는데 무리는 없을 테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를 발견하고는 친구와 나 모두 헛웃음을 지었다. 깨어진 렌즈로 리스본의 야경을 담았다. 그날의 사진을 깨어진 사월의 리스본이라 칭하였다. 


깨어진 사월의 리스본은 오늘 마주한 파리의 하늘과 같은 빛깔이었다. 분홍의 옅음이 희끄무레한 푸르름 속에서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깨어진 렌즈로 바라보는 분홍빛 하늘은 여전히 영롱 하였다. 깨어진 것이 무색할 만큼 어여쁜 노을을 당신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여행길에서 만난 흔한 인연처럼 스쳐 지나는 듯 하였다. 분홍빛의 사진과 함께 곧 여행 할 리스본의 날씨를 조심하라 넌지시 전한 것이 우리의 시작이 되었다. 그만큼 이곳의 분홍빛 하늘은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나의 가장 비싼 재산 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잃었음에도 당신에게 연락할 핑계 정도로 생각하였다.


오히려 깨어진 렌즈로 분홍빛 하늘을 당신에게 보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흐릿하게 비친 리스본의 분홍 하늘은 우리가 선연하게 채워나가야 할 색깔임을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분홍의 옅음은 당신에게 느낀 설렘과 같은 빛깔이었고 그 마음이 조금 다르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의 천장과 나란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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