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파리에서 여행객이 아닌,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중학교가 끝나 갈 때 즈음.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이별이 아쉬웠던지 간혹 빌려다 읽고 하였던 책 한 권을 넌지시 나에게 건네었다. 친구는 다 읽어서 준다는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책 속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꽂혀있었고 그것은 서투르게 눌러 적은 이별의 섭섭함이었다.
그렇게 선물 받은 책은 어느 지리교사와 그의 아내가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적은 기행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서점에 가면 무수히 꽂혀있는 어느 여행 가이드 북과 다름없지만 당시에 유럽여행은 또 흔했던 것은 아녔기에. 그 책은 나의 가방 속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지금 나에게 유럽이란 곳을 꿈꾸게 한, 책 속에 담겨있던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어느 산 속이었는데 절벽 위로 빨갛게 칠해진 산장이 하나 있었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던 스위스의 풍경이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중학생 소년의 엄지 손가락으로도 가려지는 자그마한 산장이었다.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렸을 때는 스위스의 어느 산속 풍경에서, 손가락을 떼어보니 산장과 함께 보니 풍경의 이름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나도 언젠가 저러한 풍경에 빨간 점 하나 찍어 비경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조금 유치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건축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살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라는 것이다. 왜 굳이 파리에 오게 되었냐고. 그럼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파리가 스위스에서 퍽 가깝고, 내가 보았던 알프스는 프랑스에 뻗어 있는 산맥의 일부 일 수도 있으니 괜찮은 이유가 아니냐 웃으며 말하고는 한다. 실제로 프랑스에 온 뒤 학교를 편입할 때나, 대학원을 시작할 때. 또, 회사를 지원할 때 CV(이력서), Portfolio(포트폴리오) 그리고 Motivation(동기서)가 필요한데 그 동기서의 가장 첫 단락에 적히는 문장이 되어주었다.
Tout commence par un souvenir
모든 건 하나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일기장 가장 첫 장에 적어둔 문장이다. 학부 때는 프랑스에서 건축을 공부한다는 게 좋으면서 버거웠다. 한 학기에 이수해야 할 학점은 서른 개의 학점이며 심지어 하나의 학점을 위해 4시간씩 듣는 수업도 있었다. 또, 건물들의 입면들은 왜 이렇게 화려한지. 건축사 수업 과제를 위해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당의 입면을 건물 유리창에다 종이테이프로 붙인 뒤 연필로 덧 데어 그리고 또 그렸다. 한 번은 철학 수업을 아침 8시부터 들었는데 그때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외국어로 누군가의 철학과 그에 반하는 논리들을 이해하며 정리한다는 것은 지금 다시 하여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파리에서 건축가로 살고 있는 지금, 그 사실들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좋다. 당장 출근길만 하여도 비록 불타버렸지만, 노트르담이 보이고 에펠탑이 그 뒤로 중첩되어 보인다. 서울에서처럼 이곳도 출근 시간이면 지하철이 터질 것 같고 수시로 파업을 하는 바람에 출근길이 막막할 때가 있긴 하지만 고작 몇 정거장이니 참을만하다. 일하고 있는 사무실은 바스티유 광장에 위치해있다. 가끔 여행객들에게 바스티유 광장을 설명하면 어렴풋 들어본 것 같다고 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는 마레지구에 있는 메르시 매장이나 APC 위치를 기준으로 설명해주면 쉽게 아는 듯하다.
사무실은 지하까지 포함하면 총 8개의 층이 있고, 내가 일하는 곳은 7층. 건물의 가장 꼭대기층이다. 회사에서도 가장 일이 많은 층으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회사에 일이 없는 시기에도 우리 층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야근을 하긴 하지만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혹, 야근을 하더라도 야근수당 혹은 그 시간만큼 유급 휴가를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작은 설계 사무실들은 야근을 더 자주 한다 들었지만 그래도 마감일이 아닌 이상 되도록이면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 문화이다.
일하는 시간 자체는 한국보다 평균적으로 더 짧다. 물론,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일하는 곳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무엇보다 점심시간으로 한 시간 반을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밥을 빨리 먹으면 한 시간 정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날이 좋은 날이면 회사 앞 카페의 테라스에서 책을 읽다가 들어간다. 지금도 점심시간에 조금씩 적어둔 글을 모아 정리하는 중이다. 햇볕 좋은 날, 파리에서의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황홀한 것이니 나중에 더 자세히 써보려고 한다.
퇴근을 하면 저녁 여섯 시쯤이다. 해가 긴 유럽의 여름에는 생각보다 퇴근 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입사했던 계절은 이른 봄이었으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그때가 되면 일이 많이 몰린다. 다들 여름휴가를 한 달씩 가기 때문에 바캉스 전, 맡은 프로젝트 마무리를 잘해둬야 한다. 나의 경우, 인턴이 끝난 후 계약을 한 첫 달이었고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사수가 한 달 동안 휴가를 가 버리는 바람에 겨우 4개월 차 주니어 건축가가 디렉터와 직접 의견을 주고받으며 프로젝트를 수정,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의 마감일은 꽤 남았었지만 하루하루가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 몇 주 동안은 퇴근 후, 혼자 센 강에 자주 나갔던 것 같다. 답답한 마음도 있었고 사무실에서 받던 스트레스를 강가에 풀어버릴 요량이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퐁네프 아래의 여행객들 사이에 끼여 맥주 한 캔 홀짝이다 집으로 돌아갔다.
파리에서 건축가로 산다는 게, 사실 적어 놓고 보니 파리에서 직장인으로 산다는 제목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나열하고 설명하는 글이 파리에서 건축가로 산다는 게 누군가에게 더욱 와 닿을 수도 있겠다. 건축이라는 게, 그 땅이 허락하는 풍경을 잠시 그려진 공간으로 잡아두는 일이니깐. 그래서 건축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변의 풍경도 함께 보인다.
그런데, 그런 것 보다 조금 더 일상적인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일을 하다 굳어진 어깨와 허리도 풀 겸 스트레칭하며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 위로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보인다. 그 틈 사이에서 매일 변화하는 풍경을 보며 퇴근을 갈망하는 한 건축가가 파리에 살아가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