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
소녀가 걷고 있다. 버섯을 따며 차분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저 고요하고 지극히 평범한 숲속의 그림이다. 하지만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이 그림에 속고 있다. 그림은 장대하고 정갈한 살해극이 될 드라마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의 오프닝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엄숙한 기숙학교에 한 북군 병사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소용돌이의 드라마다. 길을 걷던 소녀는 다리를 다쳐 쓰러져 있는 존을 발견하고 그를 부축해 기숙 학교로 돌아온다. 기숙 학교에는 교장 선생인 마사를 비롯 일곱 명의 여자들이 살고있다. 그러니까 여자들만이 있는 공간에 외부의 침입자, 그것도 남자가 들어선 것이다. 영화는 이후의 파장을 그려간다. 미묘하고 미세하게 달라지는 여자들의 태도와 이에 반응하는 존의 액션까지 길지 않은 영화의 상영 시간을 채우는 건 이러한 감정의 결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은 곧 기숙 학교의 엄숙함, 크리스천의 정절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미묘하게, 그리고 미세하게.
영화가 주목하는 건 감정의 교차, 감정의 엇나감, 감정의 정체, 감정의 폭발 등 감정의 양상이다. 조금 과장해 감정의 의인화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일곱 여자들의 감정 묘사에 공을 들인다. 엄숙함 사이에서 욕망을 내비치는 사라 선생과 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듯 보이게 드러내는 감정의 조각들은 극의 리듬은 물론 질감까지 갖추게 한다. 나아가 감정이 폭발을 했을 때, 그러니까 억압과 욕망의 골이 곪아 터녀나갔을 때 감정은 미치광이가 된 듯 발광하는 존으로 구현화된다. 다리를 하나 잃고 여자들을 위협하는 존은 억압에 시달리다 터져버린 여자들의 욕망, 그 상처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건 영화의 우아함이다. 영화는 잔혹한 살해극을 그려내면서도 종교의 기품, 엄숙함의 기운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욕망을 발하였으나 끝내 엄숙함 속에서, 억압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존을 죽음으로 보내는 식사를 준비하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합시다'라고 말하는 마사나, 식사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정면에서 원근이 강조되게 찍은 카메라의 위치는 그녀들을 여전히 엄숙한 기숙 학교에 고이 모신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살해극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1971년 돈 시겔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전체적인 줄거리의 줄기는 동일하다. 다만 소피아 코폴라는 원작에서 주요한 남자 캐릭터를 치워버렸다. 온전히 여자들만의 집단 안에서 남자라는 침입자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녀는 원작을 변형했다. 결과는 억압과 여자의 욕망이라는 구도에 보다 밀접하게 접근한다. 일곱 여자 캐릭터 중 어느 하나 쓸모 없는 것이 없고(거의 조용하기만 하던 막내 여자 아이가 마지막에 존에게 버섯을 먹이자고 제안한다), 질투의 드라마가 있긴 하지만 상투적인 여자의 감정으로 캐릭터를 옭아매지 않는다.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은 오프닝의 버섯 신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마무리다. 시체가 되어버린 존을 집 밖에 내다 놓고 파란색 천을 대문에 매단 뒤 그녀들은 학교의 정문 앞에 서 정면을 응시한다. 카메라는 점점 밖으로 멀어지는데 기숙 학교라는 엄숙한 우아함에 갇힌 그녀들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소녀가 걷고 있다. 버섯을 따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저 고요하고 지극히 평범한 살인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