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랑은 아프고 애절해서 결국엔 눈물 한 방울의 고독으로 남는다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밖에 온 지 오래 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 합니다. 사랑도 맘편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찾아온 줄 알았는데 곁에 아픔이 있고, 현실이 아프다 생각했었는데 옆에 더 아픈 현실이 있습니다. 김양희 감독의 영화 '시인의 사랑'은 시를 읊으며 문을 열고 시를 읊으며 문을 닫는 영화입니다. 섣불리 사랑에 다가가지 못하는 남자와 현실의 늪에서 허덕이는 소년. 둘 사이의 거리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품고 있고 있습니다. 시라는 형태로 밖에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어떤 감정, 시어로만이 구현할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이 영화에는 있습니다. 그 아스라함이, 애절함이, 애달픔이 간절해 가슴이 미어집니다. 조심스러운 감정에, 조심스러운 세계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가엽고 소중하며 아름다운 영화라 느꼈습니다.
시인은 슬픈 사람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시인 현택기(양익준)는 말합니다. 포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포졸이고 인생 한 자락에 날아든 것은 고작 까마귀 한 바리 뿐입니다. 그는 월수입 30만원에 정자 감소증을 앓고 있는 서투른 남자입니다. 대신 울어줄 사람 이전에 자신의 삶이 막막합니다. 수업을 하는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돼지라 놀림을 받고 아내는 자꾸만 아이를 만들자고 보챕니다. 시상이 떠오를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느날 도너츠와 함께 시상이 다가옵니다. 바로 도너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 세윤(정아름)입니다. 세윤이 어느 여자와 화장실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본 날 택기는 오랜만에 발기를 하고 몇자를 적어 내려갑니다. 움트리고 있었던 감정은 마치 아이가 세상에 발을 딛듯 조심스레 밖으로 모습을 비춥니다. 시인의 세계입니다.
사랑은 작은 호감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시인에게는 시상일 수도 있습니다. 택기는 사랑을 시의 세계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남자 고등학생 세윤이란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딱딱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은 택기의 아내에게 일임합니다. 영화는 그저 감정의 움직임, 사랑의 끌림, 세계의 형상을 시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마술 같았던 장면을 만났습니다. 바로 세윤이 아픈 아빠를 등뒤로 고스톱을 치고 있는 엄마 무리를 본 뒤 집을 나와 거리를 걷는 신입니다. 세윤은 찬 바람을 맞아가며 길을 터벅터벅 걷는데 마치 택기가 아파하는 것 같았습니다. 택기의 시상 세윤이 아파하는 건 택기의 세계가 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장면이 더 있습니다. 처음으로 데이트 아닌 데이티를 마치고 버스에서 시를 주고받는 대목입니다. 죽은 개로 시작하는 문장이 오가면서 시어가 완성될 때 그 장면은 그 어떤 언어로도 구획할 수 없는 순수한 무엇이었습니다. 택기는 (아 마도 이 시도 포함됐을) 시집으로 미당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사랑은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후반부 영화는 조금 납득할 수 없는 택기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임신했다는 아내를 물리치고 세윤에게로 가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시인이라지만 가정을 소홀히 하는 데에도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택기의 아내를 연기한 전혜진은 이 속절없읍에 애달파 하는 인물을 전형적이지만 정말로 애달프게 연기했습니다. 물론 택기가 마지막에 택한 건 아내와 가정입니다. 시인의 사랑은 상처를 품고 있기 마련이고 시인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남의 슬픔을 대신해 울어주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일견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세윤은 택기에게 돈을 받아 상경했고, 택기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영화는 아들의 돌잔치 장면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를 긁적이다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려던 택기는 손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합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시인의 사랑은 이렇게나 아프고 애절해서 결국엔 눈물 한 방울의 고독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