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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02. 2017

아오모리를 생각하다

아오모리에 왔더니 아오모리가 있었다

아오모리의 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벚꽃 융단이 깔린다는 히로사(弘前) 성의 해자, 세계 자연 유산이라는 시라카미(白神) 산지, 습지와 고산 식물의 보고라는 핫코다(八甲田) 산 같은 게 아오모리에 있다는 사실을 안 건 소박한 공항에 내려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이쯤 되면 잘난 척을 떨 법도 한데 아오모리는 조용하다. 현청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한 대학생은 아오모리 사람들에 대해 '말수가 적고 부끄러워한다'고 말했다. 이럴 때 도시는 사람을 닮는다.


공항은 정말로 소박했다. 광활한 활주로와 달리 짐을 싣고 나르는 레인은 달랑 하나였고, 곁에는 역시나 작고 소박한 매점이 두 세 개 있었을 뿐 별다른 면세점이 없었다. 현재 아오모리 공항에 취항하는 국제선 항공사는 대한항공과 중국항공 단 두 개. 역시나 소박하다. 하지만 아오모리는 내실있다. 동북 지역 중 외국인 관강객 수가 가장 많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침체되었던 경기는 되살아나기 시작해 2018년 20만 숙박객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청에서는 담당자가 아오모리의 매력에 관해 설명을 했는데 여느 인기 관광지 못지 않은 리스트를 갖추고 있었다. 아오모리의 북족과 남쪽을 잇는 핫코다 산맥은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타테야마(立山) 부럽지 않고, 네부타라 불리는 네부타 마츠리(ねぶた祭り)는 일본의 3대 마츠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오모리는 내성적이다. 할 말은 많지만 주저하고 겸양을 떠는 타입인 것이다. 여행 중 나와 닮은 도시를 만날 때면 설레곤 한다. 아오모리는 나를 설레게 했다.



일본의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닐 때면 느끼는 것이 있다. 작지만 충실하다. 작지만 견고하다는 느낌이다. 시마네(島根)와 돗토리(鳥取)의 작은 마을들을 다녔을 때 나는 인구 14만인 요나고(米子) 시에서 벨기에의 디자이너 브랜드 앤 드뮐미스터의 티셔츠를 구입했고, 인구 50만에 불과하는 돗토리의 어느 마을에선 내 인생 최고의 카푸치노를 맛보았다. 작지만 남 부럽지 않은 것이 일본 지역 도시들의 특징이다. 그리고 아오모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나 마츠리에 관한 이들의 열정과 긍지, 자존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철통같은 것처럼 보였다. 리조트 체인 호시노야(星のや) 아오모리야의 식당 미치노쿠 마츠리야(みちのく祭りや)에서 식사를 하며 네부타 마츠리를 보았는데 여기엔 단순한 전통 이외의 무언가가 있었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어떠한 정례와 의식, 그 안에 담긴 마음과 혼.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 결혼을 하면서 아오모리에 와 살고 있다는 아오모리 시의 관계자는 가이드를 해주며 '다들 하기 싫어해요. 그런데 안 할 순 없어요'라고 말했다. 하기 싫은데 안 할 순 없는 것. 어쩌면 현대의 도시에 필요한 건 전통이라기 보다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싫지만 지키는 것, 하지만 할 때는 기꺼이 지키는 것.


일본은 지금 지역 활성화가 활발하다. 고령화, 저출산 시대의 지역을 살리는 길은 새로움을 빚어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도쿄의 마루노우치(丸の内) 구역에는 안테나 숍이라 불리는 지역의 특산물 숍이 들어서있고, 일본 정부는 말 그대로 일본 덩어리 그대로를 건물로 옮긴 마루고또니뽄(丸ごと日本)을 아사쿠사에 세웠다. 아오모리 역시 지역 활성화 중이다. 그 중 하나의 예는 아트를 통한 지역 활성화인데, 그 일정의 일환으로 담보 아트(だんぼアート)와 토와다시현대미술관(十和田市現代美術館) 견학을 하였다. 담보 아트는 한국말로 풀면 논밭 예술이다. 논밭에 품종을 달리 씨앗을 뿌려 서로 다른 색의 싹을 내게 하고, 그렇게 특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일컫는다. 내가 찾았을 때에는 일본의 유명한 신화인 '야마타노오로치(ヤマタノオロチ) 전설' 중 스사노오노미코토(スサノオノミコト)가 야마타노오로치(ヤマタノオロチ)와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일정을 내내 함께 했던 친절한 스즈키 씨는 '처음엔 초등학생 그림 그리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랬다. 예술은 이렇게 때로 성장한다.



도와다 시에 있는 도와다시현대미술관은 일본의 지역 도시를 다시 바라보게 해 준 좋은 공간이었다. 도와다 시는 인구 고작 6만을 넘기는 작은 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엔 론 뮤익, 최정화, 요시토모 나라, 서도호, 페데리코 헤레로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설로 말이다. 그 중 눈에 띄었던 건 '보다'를 실험하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던 점이다. 먼저 김참겸의 작품은 어두운 실내 안에 거울과 수조, 그리고 가구가 설치되어 있었고 거울 속에 거울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비춰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기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거울에 비친 누군가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 즉 거울이 바라본 누군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어는 우리도, 누군가도 아닌 바로 거울이다. 고속도로의 다이닝 바를 연출한 한스 옵 드 빅(Hans Op de Beeck)의 작품은 어둠과 원근법을 이용해 실제하지 않는 것을 실제하게끔 느끼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는 의미로 읽었다. 실제로 테이블에 앉아 쉴 수 있게 되어있어서 피로에 지친 다리를 쉬게 하기에도 썩 좋았던, 그러니까 실용적인 작품이었다.


도와다시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오노 요코의 'Wish Tree for Towada Riverbed Bell of Peace'다. 오노 요코가 미술관을 위해 심었다는 나무의 초기 사진과 지금은 열매가 달린 나무의 실제 모습을 비교해 보니 어딘가 애잔하고 멜랑꼴리한 느낌에 사무치게 되었다. 아모모리는 이 미술관 하나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건 샤미센 체험과 마츠리 중 하네토 역할 놀이다. 어느 하나 쉽지가 않았고,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의 전통은 그만큼의 시간과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느낀 아오모리의 일본이다. 마츠리의 하야시 한 구절 한 구절에 그 자세가, 태도가, 마음이 새겨져 있다. 아오모리에 오기 전 내가 알고 있는 아오모리는 사과였다. 그리고 지금 알고 있는 아오모리는 아오모리다. 아오모리에 왔더니 아오모리가 있었다. 이 얼마나 안심되고 기쁜 일인가. 어디를 가든 비슷한 국내의 지방과 달리 아오모리엔 아오모리만의 음악이 있었고, 아오모리의 음식이 있었으며, 아오모리의 문화가 있었고, 아오모리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오모리는 큰 소리를 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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