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모리 타츠시의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이 말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
영화가 사람에게 다가가기까지에는 어느 특정한 타이밍이란 게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정해진, 흐릿하게 새겨진 어느 시간 같은 거 말이다.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이란 제목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드라마를 통해서다. 시즌이 바뀔 때마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훑는 나는 그 때도 아무렇지 않게, 별 생각없이 드라마를 훑고 있었고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이라는 제목도 참 긴 드라마와 만났다. 하지만 나는 1화를 조금 엿보기만 했을 뿐 그냥 패스해버렸다. 마츠다 류헤이와 에이타가 심부름집의 두 남자로 출연하는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비루해보였고 당시 내겐 그 비루함을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연출을 하는 사람이 오오네 히토시란 사실도 그리 끌리지 않았다. 그렇게 4년 넘는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을 만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영화 '세토우츠미'를 보게 되었고(이 영화는 도쿄에서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린 작품이다, 게다가 스다 마사키와 이케마츠 소스케가 나온다), 감독인 오오모리 타츠시가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의 연출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래서 찾아봤다. 비루함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영화가 사람에게 다가오기까지에는 어느 특정한 순간이 필요하다.
영화는 미우라 시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 주인공은 마츠다 류헤이와 에이타고 전반적인 설정이나 배경은 동일하다. 마호로 역 앞에서 심부름 센터를 운영하는 타다(ただ、일본어로 그냥, 공짜, 모든 지 다의 의미와 뉘앙스를 가진다)와 쿄텡이 이러저러한, 사소하고 때로는 거대하며 또 대부분은 자질구레한 민원을 처리하는 일상을 그린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하고 사소하고 가끔 거대한 일상에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교텡의 전 아내의 딸, 그러니까 교텡의 딸을 한 달 반 동안 돌봐야 하는 민원을 의뢰받은 것이다. 교텡은 어릴 적 컬트 종교에 빠진 엄마 탓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었고, 그래서 아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타다는 이 사실을 며칠 간 안고 끙끙 앓는다. 그리곤 아이가 찾아오는 전날에서야 말하는데 교텡의 반응은 예상대로 완고하다. 그래도 둘은 아이를 돌보기로 한다. 그래야 영화가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줄거리는,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사건과 줄거리,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역시 마찬가지다.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집'에서 사건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자리한다. 그러니까 그저, 타다(ただ) 살아갈 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태도와 자세의 영화로 보았다. 영화에는 삶을 살아가는, 시간을 이겨내는 자세로 성실함(마지메, 真面目)을 얘기한다. 아니 보여준다. 타다는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작고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성실히' 하고 있는 타다 심부름 센터의 타다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태도가, 자세가 어여쁘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거대한 포부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야심찬 욕망도 없다. 그는 그저, 타다(ただ) 일상을 살 뿐이다. 성실하게 말이다. 그는 신사에 가 소원을 빌면서도 '편안한 한 해가 되기를, 조금은 좋은 일도 있기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귀엽고 가여운 소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줄거리가,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이 영화가 지루하고 지난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엔 제대로 사건이 있고, 클라이막스가 정점에 치닫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건이, 클라이막스가 전해주는 것은 일상을, 지금을 성실히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다. 특히나 쿄텡이 버스 안에서 총격을 당해 병원에 실려간 신에서의 대사는 일상이 왜 이리 사람 맘을 미어지게 하나 싶을 정도로 애절하고 애달프다. '살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몇 번이나.' 그리고 영화는 문을 닫는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비루함을 받아들일만큼 여유가 있냐고 한다면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아직도 갖고 있는 것들이 속 시원히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고, 아니 정리는 됐는데 채워넣지 못한 상태이고 그래서 허전하고 허망하다. 안다. 물론 안다. 그래도 타다처럼, 마지메니(真面目に), 성실히 살아가는 게 정답이란 것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말처럼 되지 않는다. 일단은 하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둘 해나가자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어딘가 부족한 마음은 지울 수 없다. 10년의 샐러리맨 생활 후유증인 걸까. 그저 게으름의 변명인 걸까. 그래서 '도너츠 홀'이란 이름의 잡지를 브런치에 만들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다. 주말과 평일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지 벌써 일년째다. 휴일이 반갑지 않은 지도 벌써 일년째다. 월급이란 게 사라진 지도 벌써 일년 째다. 그러니까 소위 프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프리한 게 좋냐고 한다면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나는 나도 몰랐지만 꽤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 안에서 자유를 느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프리한 사람이 되어버렸는걸. 그저, 타다처럼, 그냥, 타다(ただ) 살아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