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오래된 주제
드라마 '유성'이 말하는 애달픈 사랑의 엘레지
사랑은 해파리와 같다. 숨이 다한 육신을 물속에 흘려보내는 바다의 생명체처럼 사랑은 아슬아슬하게 유영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평생을 약속할 것 같은 믿음도, 죽음도 불사할 것 같은 열정도 현실의 파도에 씻겨 어느새 없던 일이 되고 만다. 모두가 사랑을 약속할 때 그 끝은 암초처럼 불길한 모습을 드리우고, 찬란히 빛나던 눈빛은 끝내 어둠에 자리를 내준다. 영원하지 못해 영원한 사랑, 이 묵직한 상처는 아마도 사랑의 가장 큰 테마가 아닐까. 후지TV의 월요 드라마 <유성>이 그리는 사랑의 이 오래된 주제가 요즘 시청자의 눈길을 잡는다.
후지TV의 월요 드라마 게츠쿠의 명성이 사라진 건 꽤 오래다. <러브 제너레이션> <롱 베케이션> <야마토나데시코> 등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의 명가를 자랑하던 후지TV는 게츠쿠의 부진으로 수년째 어깨를 펴지 못하고 있다. <고쿠센> 시리즈로 상승세를 탄 일본TV가 오히려 <호타루의 빛> 시리즈, <파견의 품격> 등 2,30대 여성 타겟의 드라마로 드라마 명가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최근 방영된 게츠쿠도 10% 초반대의 시청률을 전전했다. 10대를 타겟으로 한 학원물도, 판타지와 시대물의 뒤섞은 <서유기>같은 작품도 하향세를 뒤집지 못했다. 게츠쿠의 명성은 90년대의 전성기를 뒤로 끝없는 나락일 뿐이었다.
드라마 시청률의 저조는 사실 게츠쿠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일본 TV의 드라마는 시청률 20%도 좀처럼 넘기지 못한다. TV 콘텐츠로서 확실한 역할을 담당했던 90년대와 달리 최근의 드라마는 TV에서 위치가 꽤 애매하다. 인터넷, 아이폰에 눈을 돌린 일본 대중이 방영시간을 체크해 TV의 채널을 켜지 않고, TV를 틀어도 50여분 동안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는다. 많은 설문 결과들도 본방송을 시청하는 비율이 점점 줄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TV는 그저 템포가 빠른 오락프로그램에 적합한 매체가 되었다. 트렌드와 유행, 화제가 수시로 바뀌는 일본에서 TV 드라마는 시청자를 잃은 셈이다.
하지만 <유성>은 TV 드라마의 재미를 정통 화법으로 보여준다. 후지TV가 주관하는 시나리오 공모전 ‘영 시나리오’의 2008년 수상작을 토대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90년대 게츠쿠가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방식 그대로 사랑의 이야기를 한다. 비현실적일 정도의 극한 상황, 거짓말처럼 피어나는 위험한 사랑, 감정의 결을 세세히 어루만지는 듯한 섬세한 대사. 전성기 일본 드라마가 잘했던 것들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동생의 간 이식을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남자와 빚 청산을 위해 그 제안을 수락하는 여자의 이야기. 뻔하고 익숙한 설정이지만 <유성>은 아무리 낡았어도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역시 전통의 사랑 화법뿐이라 생각하게 한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그리고 감정으로 50분을 꽉 채우는 드라마. 오랜만에 보는 게츠쿠다.
시청률의 부진 탓인지 최근의 일본 드라마는 사건과 뉴스를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파견 사원의 애로사항을 소재로 삼은 <파견의 품격>이 성공한 뒤 그 경향은 꾸준히 이어졌다. <골드>는 2010년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노 골드의 수모를 당한 일본을 드라마의 전제로 삼았고, <결혼활동>은 만혼화 사회에서 결혼의 상대를 쉽게 만나지 못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실상을 이야기꺼리로 가져왔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가을 드라마 중에서도 <황금돼지>나 <사채꾼 우시지마>는 일본의 실상을 바탕으로 에피소드를 꾸며간다. 그래서 철저히 TV 드라마 장르 안에서 재미를 쌓아가는 <유성>이 더 눈에 띈다. 시청률은 여전히 10% 중반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유성>은 탄탄한 이야기, 일본 드라마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일본 드라마의 장점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다. 모두가 TV 밖에서 답을 찾을 때 TV 드라마의 장점을 다시 꺼냈달까. 게츠쿠의 황금기를 추억하게 하는 드라마 <유성>이 올 가을 그 어떤 사랑 얘기보다 애절하게 마음을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