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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24. 2017

절망을 그리는 희망

시간과 우연이 일으킨 삶, 살아지니까 살아간다.



쿠마키리 카즈요시 감독의 '카이탄시 풍경 海炭市叙景'을 보고 스다 마사키가 부른 요시다 타쿠로의 '오늘까지 그리고 내일부터 今日までそして明日から' 영상을 보았다. 어떤 흐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무언지 모를 무언가에 의해 하루가 채워지는 순간이 더러 있다. 어찌됐든 두 영화와 노래는 내게 차례로 다가왔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막막했고, 감정이 내 몸을 뚫고 터져 나올 듯 벅차 올랐다. 어쩌면 영화는, 노래는 내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카세 료가 나온다. 오래 전, 아마도 '씨네21'에 다니던 무렵 한 일본 통신원이 올해의 일본 영화로 '카이탄시 풍경'을 꼽은 적이 있다. 카이탄시는 가공의 도시다. 홋카이도에서 촬영을 했을 만큼 극한에 떠는, 그만큼의 아픔으로 뭉쳐진 고통의 도시다. 영화는 모두 다섯 쌍의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그 면면이 아픔에 떨고있다. 일상이라 부르는 것 조차 미안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다. 선박의 완성만을 기다리며 매일을 사는 이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모형의 별을 보여주는 관측소에서 일하는 남자가 진짜 별을 본 지는 꽤나 오래 전이며, 잘 풀리지 않는 사업에 힘들어하는 가장의 분노와 화는 자리를 찾지 못해 가정의 하루를 파탄낸다. 더해 재개발 광풍에 홀로 남은 노인의 초라한 집과 풀지 못한 세대의 갈등을 품고 사는 부자까지. 구석부터 구석까지 추워보이는 이 곳은 사방이 가로막힌 허허벌판이다. 나는 여기서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상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건 지나간 내 일년에 다름 아니었다.



심지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을 쓴 사토 야스시는 미시마 유키오 상, 아쿠타카와 상 후보에 수 차례나 올랐지만 수상엔 실패한 작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이탄시 풍경'이 그의 유작이다. 그만큼 기구한 작품이다. 상실이 덕지덕지 붙은 상처 덩어리이기도 하다. 차비가 모자라 아내만 배에 태운 남편은 끝내 아내와 재회하지 못하고, 그나마 노인 곁에 있어줬던 고양이 구레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가스 회사의 사장은 침체를 면치 못하는 회사의 사정을 다른 상품으로 대체해보려 하지만 그 수고 역시 전날 남편에게 폭행당한 아내의 전화 상 폭언으로 물거품이 되고만다. 무엇하나 희망을 품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기만 한다. 더구나 첫 편에서 전해지기 시작한 선박 회사의 정리 해고와 노동자들의 파업 뉴스는 전편을 아울러 계속된다. 도시 전체가 어둠과 아픔에 감염된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 상처 덩어리 안에서, 이 상실의 품 속에서 내일을 그려낸다. 쿠마키리는 인물들을 추위에 떨며 일출을 보러 가 어김없이 새해를 밝히는 태양과 마주하게 하고, 마지막 편에 등장하는 남자의 버스에 태워 앞으로 함께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구레는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 노인의 품에 안긴다. 세상은 '그래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살아진다'는 사실을 영화는 아픔을 토해내며 얘기한다. 그 미묘한 차이가 실은 엄청나게 다른 내일을 가져온다는 걸 나는 모르고 살았다. 그래도 살아가는 삶에 기댈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지만 그래도 살아지는 삶엔 우리가 몰랐던 우연이 잠자고 있다. '오늘까지도 그리고 내일부터' 우리는 살아간다.




카세 료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영화에서 가장 내 마음을 울린 건 네 번째 이야기다. 바로 가부장적 아빠와 신경질적이고 나약한 엄마, 그리고 무기력한 아이로 이뤄진 가족 이야기. 카세 료는 폭력을 휘두른다. 학원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한 아내를 주먹과 발로 무차별 공격한다. 그리고 그는 가스 통에 발등이 찍힌다. 폭력이 돌고돌아, 분노가 돌고돌아 자신에게 돌아온 셈이다. 그 화와, 그 분노와 마주한 사람의 내면을 이렇게 불안하고 치명적이게 표현한 얼굴을 나는 다시 또 볼 수 없을 것 같다. 카세 료는 공포와 아픔, 그리고 분노 그 정가운데 자리한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가정을, 시간을, 삶을 그는 그 자체로 살아간다. 힘없이 떨군 어깨와 내일의 기운을 잃은 두 눈이 이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 칠흙같은 어둠 속의 가정조차도 혼자는 아니다. 영화는 그걸 담아낸다. 아들 아키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경리 여직원에게 망원경을 어떻게 쓰냐며 물었었다. 그리고 여직원은 그에게 望遠鏡라고 적어줬다. 그런데 남편에게 화가 난 아내가 다가와 종이를 구겨 쓰레기 통에 던져 넣는다. 아들의 내일조차 구겨지는 일상이다. 그런데 이 종이는 다시 등장한다. 여직원이 퇴근 후 뒤를 돌아보며 주머니에서 이 종이를, 望遠鏡라 쓰여진 구겨진 종이를 꺼내보는 것이다. 영화적 순간이고, 삶이 구원되는 장면이다. 구석부터 구석까지 빛 한 줄기 없을 것 같았던, 아니 실재로 그랬던 도시는 그래도 내일을 맞이한다. 어제를 이겨낸, 오늘을 극복해 낸 내일이 아니다. 그냥 마주한 내일이다. 그래도 살아지는 삶을 마주할 때 우연은 찾아온다. 그게 인생이다.



뭐를 잘못했나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생각한다. 걷는 곳마다 잘못이 발에 치이고 머무는 곳마다 아픔이 스며든다. 그래도 노래가 있어, 그래도 영화가 있어, 그래도 책이 있어, 그래도 글이 있어 숨을 쉰다. 그렇게 내일을 맞이한다. 너무나 자주 남의 이야기에, 남의 삶에, 남의 시간에, 남의 아픔과 이겨냄에 기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종종 허무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가온 노래도, 영화도, 책도 다 내 삶의 일부이다. 내일이 설레이던 때를 생각한다. 내일이 괴로웠던 때를 생각한다. 내일이 지독했던 때도, 내일이 피곤했던 때도 생각한다. 지독히도 아름다웠고 지독히도 볼품 없었으며 지독히도 소중했던 날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내일을 그려보고 그렇게 내일을 지워낸다.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생각한다. 작은 조각을 생각하고 작은 시간을 생각한다. 생각이 닳고 닳아 자욱이 될 때까지 생각한다. 아침을 먹고 이불을 덮은 채 누워 보통은 30분, 길면 한 시간 조금 덜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 따뜻하고 포근해 좀처럼 일어나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그것과 같은 맘으로 어서 일어나 방송을 듣고,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래도 살아진다'는 생각은 수동적이고, 나태한 사고 방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 '그래도 살아지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어찌할 수 없기에 가능한 것도 있다. 어제를, 과거를, 지나간 시간을 극복해나가는 것만이 내일을 맞이하는 시간이란 법은 없다. 그것과 함께하는, 그것과 함께 나아가는 시간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런 시간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분명 이 세상에는 있다. 그래서 이제야 나는 내가 왜 스다 마사키의 '오늘까지 그리고 내일부터'에 울었는지를 알 것 같다. 살아간다, 계속 살아간다. 살아지니까 살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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