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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23. 2017

사랑은 단어 밖에 있다

클레어 드니 Let the Sunshine In



사람은 종종 멈춰서곤 한다. 세상 모든 게 애매해지고 모호해지는 상황은 불현듯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모든 걸 혼동케 한다. 자리는 흐릿해지고 감정은 장소를 잃으며 생각은 허공을 떠돈다. 이러한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돌연 멈춰서게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지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아갈 수가 없다. 사회적 자아의 상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단어의 상실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꽃은 꽃이라 부를 때 꽃이 된다는 시구절도 있듯이 이름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세계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역시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 세계를 세계라 부르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본래의 세계가 아니다. 단어의 세계다. 어느 규칙 속에 지어진 이름의 총체며,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까지, 우리의 마음까지 단어가 커버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란 표현을 종종 쓴다. 말로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본래의 세계다. 그것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며, 세상 속에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멈춰선다. 본래의 세계 앞에서, 단어를 헐벗은 세계 앞에서.  



클레어 드니 감독의 '렛 더 선샤인 인 Let the Sunshine In'은 단어를 헐벗은 자신 속 세상과 마주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림을 그리고 미술관에서 일하는 여자 이자벨은 진짜 사랑을 하고싶다. 한 번의 이혼과 수 차례의 만남과 어긋남, 그 안에서 그녀는 지쳐있다. 자신이 마음을 기대도 좋다고 생각한 상대는 섹스 이후 '사랑은 아닌 것 같다'며 돌아서고, 우연히 찾아온 남자는 처한 환경이 극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이렇게 현실적인 것들이 아니다. 진짜 사랑,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 영화는 묻는다. 영화에는 마술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는 여느 때처럼 우울에 잠겨 거리를 걷다 슬쩍 손을 내밀고 대화를 섞는 한 흑인 남자와의 장면이다. 이자벨은 남자가 함께 자신의 집에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아요. 딱 이 거리'라고 말한다. 둘 사이엔 한 보 정도의 거리가 비어있다. 그리고 덧붙이길 '자꾸 그렇게 단정하면 물러나게 된다'고 한다. 단정, 세상은 어쩌면 수많은 단정의 총합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우정이며, 이것은 미움이고, 저것은 슬픔이라는 단정. 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사랑은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으로, 느낌으로, 감정으로 받아들일 뿐 단어 안에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단어는, 단정은, 정의는 이 애매모호함을 규정하려 한다. 폭력에 다름없다.


일본의 시인 사이하테 타히에 관한 글을 쓰며 나는 언어는 의미의 감옥이라 했다. 시대도, 국적도 다르지만 클레어 드니와 사이하테 타히는 비슷한 애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언어가 옭아매는 본질을 들여다보고 단어와, 단정이 규정짓는 것들을 언어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하지만 클레어 드니와 사이하테 타히가 다른 점이 있다면 클레어 드니는 단어, 언어, 단정 속 의미의 현실 역시 들여다 보고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이자벨은 한 남자를 찾아간다. 그저 종이 한 장을 들고 벨을 누른다. 누구에게 안내를 받은 건지, 어떻게 알게됐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클레어 드니는 장광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남자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이자벨에게 조언을 건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삶, 세상, 자신을 마주하는 지혜에 다다른다. 수 차례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가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단어, 언어, 단정이 옭아맨 세상에 있다는 걸 의문의 남자는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인생을 사세요. 중요한 건 나, 주위의 사람, 나의 일이고 나머지는 그냥 놔두세요.' 모토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엔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이자벨이 남자를 찾아가기 전 의문의 신이 하나 삽이된다. 처음 등장하는 여자가 차 안에서 울고있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화를 내고있다. 헤어지려는 여자와 이별이 내키지 않는 남자의 모습같다. 이자벨의 현실을 성별만 바꾸어 재현하고 있는 듯한 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후 이자벨에게 조언과 지혜를 건네는 남자다. 여기서 의미, 감정의 현실이 드러난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알고, 통찰하는 듯 싶었던 남자도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에, 사랑이란 단어에, 그런 언어로 이뤄진 세상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어찌할 수 없이 언어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런 애달픔이 느껴졌다. 극중에서 이자멜 집 테이블에 놓여있던 책의 제목은 '실패의 미덕'이다. 언어의 세상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실패의 연속으로 살고있는지 모르겠다. 어찌할 수 없는 실패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 안에서도 그것이 실패임을 알고, 인지하고, 느끼며 사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투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는 이자벨에게 말한다. 이자벨은 남자의 말을 따라한다. 오픈, Open이라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때 조금은 언어란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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