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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08. 2018

카페에서 홍상수는...
사람'들'과 풀잎'들'

홍상수의 놀랄 변화 '풀잎들'


'좋아보인다', '좋아보이세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 '풀잎들'은 제목 그대로 길가의 풀잎들로 시작한다. 흔해빠진, 별 거 아닌, 그저 초라한 풀잎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쳐다본다.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이름조차 없는 그 잎들을 왜인지 오래동안 바라본다. 그의 영화 제목이 어느 하나 비범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풀잎들'은 그저 복수형의 명사이고, 유일하게 추상이 아닌 현실 구석에 자리한다. 묘한 단어의 조합으로 여기 너머를 은유하거나('극장전 前,傳)', '생활의 발견', '클레어의 카메라'), 애써 의미를 밀어내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 오히려 홍상수의 스물 두 번째 영화 '풀잎들'은 어느 시점부터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아무것도 아닌 않은 인사말에 가깝다. '좋아보이세요. 좋아보인다.' 별 다른 의미없는, 인사치레로 오가는, 마침표를 찍고 있지만 좀처럼 의미가 보이지 않는 말들이 홍상수 영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색함과 민망함, 위화감과 묘한 기시감이 흐르지만, 이들은 어김없이 풀잎처럼 일상의 것이고, 무엇보다 '풀잎들'은 바다나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가 아닌, 일상 깊숙한 골목 구석으로 들어간다. 마치 '당신 자신'에 몰두했던 영화가 '당신 주변의 것'을 품어내듯, 사진 속 차이의 흔적에서 다시 피사체의 시간을 떠올리듯, '풀잎들'은 현실을 사랑하려 애를 쓴다. '풀잎들'에 경계에서 고뇌하는 감독의 페르소나는 없고, 어쩌면 '풀잎들'은 '그 후'의 속편일지 모른다.  

클랙식만이 흘러나오는 카페. 그리스 섬의 이름을 가져온 'Idhra'. 아무도 올 것 같지 않는 골목 구석의 커피숍. 영화엔 모두 네 개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친구의 죽음으로 언성을 높이는 남녀와 난처한 부탁과 거절 사이에 선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지만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불편한 점심 식탁, 그리고 죽음을 외면하지 못해 휘청이는 묘연한 남자와 여자.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현실들.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현실을 비장하게 울려낸다. 홍상수 영화 중, 이례적으로 음악이 거의 그치지 않는 '풀잎들'은 그의 인장이기도 한 급작스런 줌인, 줌아웃과 함께 현실의 이면을 드러낸다. 다만, 기존의 그의 영화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고집스러운 몰두였다면, '풀잎들'은 부드럽게 유영하며, 이곳과 저곳을 오버랩하며, 현실에 흘러가는 그 '무언가'의 조각을 한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관찰자에 가까운 아름(김민희)은 맞은편, 옆 테이블의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귀가 좋고', 그녀의 다소 시니컬한 이야기는 말싸움으로 번진 홍수(안재홍)와 미나(공민정)를 두고 한 말인가 싶더니, 이내 영화는 옆 테이블 창수(기주봉)와 성화(서영화)를 비춘다. 부자연스러운 줌인과 아웃, 그리고 패닝. 화면을 벗어난 소리는 '생활의 발견' 속 경수가 종이에 열을 내며 그리던 알 수 없는 모형만큼 이질적이지만, 그건 어김없이 현실에 자리하는 무엇이고,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건 어디에도 없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 등 다수의 클래식 곡이 흐르는 '풀잎들'에서 그에 못지 않은 뚜렷한 변화는 술집에서 카페로의 전환이다. 홍상수 영화에 카페가 등장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풀잎들'의 Idhra는 '자유의 언덕'의 '지유가오카 카페'와 달리 어딘가를 향한 암시의 장소가 아니다. 시간의 얼개를 벗어난 장면들은 아침과 밤의 경계가 아리송한 비(非)시간의 공간을 만들고, 그를 대신하는 건 남자에겐 차가운 글라스, 여자에겐 따듯한 머그 잔이 놓여있는 비상한 테이블의 질서다. 어느 하나 본래의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하나 커피가 아닌 것은 아니고, 심지어 영화는 해질 무렵 술집에나 있어야 할 소주를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홍상수 영화 속 수많은 소주들이 현실을 비집고 나온 어딘가의 흔적, 혹은 그 어딘가를 향한 현실의 발버둥이라면, '풀잎들'은 가장 가까운 곳, 그저 몰라 지나치고, 아무도 찾을 것 같지 않은 카페에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몇 조각의 말들, 하지만 진짜, 혹은 감정 아니면 사랑으로 오랜 시간의 애씀을 머무르게 한다. 알 수 없는 도형이거나 무시무시한 검은 복장의 남자('밤의 해변에서, 혼자')같은 현실 너머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 곁에 흘러가는 죽음, 흘러 넘치는 말들의 조각을 품어내는 변화가 '풀잎들'엔 있다. '풀잎들'의 크레딧은 왜인지 이전과 달리 손글씨가 아닌 단정한 고딕체로 쓰여졌고, '풀잎들'은 어김없이 '머무름'의 영화다.

자기 반복이란 불필요한 비판을 받곤 하는 홍상수의 영화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반복보다 차이의 풍경이 중요해진 건 꽤 오래전이다. 그리고 '풀잎들'에서 그 차이는 보다 선연하게 드러난다. 극중에 등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배우 아니면 작가이고, 혹은 그와 관계된 인물들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연기한다는 건, 서로 다른 차이의 어울림을 겪어내는 일이고, 그 부딪힘의 작용 속에 홍상수의 영화는 자리한다. 결혼을 하겠다는 동생 진호(신석호)와 순영(이유영)을 두고 아름은 다소 히스테릭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결말 즈음 한복을 입은 채 사진 촬영을 하는 그들에게 내려앉은 밤의 가로등 빛은 아름의 말들만큼 날카롭지 않다. 소설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한 글도 아닌 무언가를 쓰는 아름은 어김없이 홍상수 영화에 진득이 이어지는 애씀의 연장으로 보이지만, 밤이 질 무렵 아름 역시 소주가 오가는 카페 테이블에 함께 한다. '결국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쉽고, 너무 힘 있고, 너무 귀하고, 너무 싸구려고'라는 아름의 말. 사랑이 되지 않아 허둥대는 사람들을 홍상수는 이제야 바라본다. '풀잎들'엔 어리석은 남자에 대한 비아냥이 없고, 냉소도 없으며, 그만큼 관객들도 텅 빈 웃음을 흘리지 않는다. 모든 건 다 사랑의 실패물, 감정의 시행착오. 아름의 말은 '매우 그립다. 그렇다. 지금은'으로 끝나지만, 풀잎들은 어쩌면 그 '그리움'을 계속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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