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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03. 2018

Unknown, 그 문턱에서.
'퍼스널 쇼퍼'

Unknown이란 대답


셀 수 없이 많은 노래를 들으며 착각의 눈물을 흘렸다.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보며 거짓된 위안을 받았다. '내 얘기 같은 것', '나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 어디에도 풀어놓지 못하는, 그저 작고 부끄럽고 유치한 망상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어차피 노래일 뿐이고, 어차피 영화일 뿐이라며 혼자 민망함을 지우려 애쓴 시간은 헤아릴 수도 없이 길다.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그 볼품 없는 또 한 번의 망상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감정을 이입한다는 건 누군가의 상황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있던 어느 감정을 만나는 일이고, 갇혀있지만 어디보다 넓은 세계를 사는 일이다. 고작 노래 한 곡, 고작 영화 한 편일 수 있는 나와 닮은 무언가에 나는 이제야 기도를 시작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 '퍼스널 쇼퍼'는 매우 비상한 영화다. 줄거리만 훑으면 쌍둥이 오빠의 죽음 이후, 퍼스널 쇼퍼로 사는 여자의 방황 이야기로 추려볼 수 있지만, 영화는 어느 공포 영화 못지 않은 불안 속에 흘러간다. 영화엔 힐마 아프 킬른트(Hilma af Klint)란 이름의, 추상 미술 이전의 세계가 흐르고, 주인공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조금의 영감을 갖고있다. 폐가처럼 변해버린 집을 방문하는, 호러 영화 전형의 플롯 하나로 시작하는 '퍼스널 쇼퍼'는 현실을 부유하는 공포가 아닌 현실에 내재하는, 가려져 있던 공포를 그려낸다. 그건 분명 판도라 상자 속 희망과 함께 존재했던 것이고, 그만큼 공포는 어쩌면 희망적이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느끼는 여자, 남의 시간을 대신 사는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는 묘하게 이승과 저승의 이어짐을 은유한다. 실제보다 이미지로 흘러가는 패션계에서, 회의와 냉소로 매일을 반복하는 모린은 현실을 부유하고, 브랜드 매장과 고용주 키아라(노라 본 발드스타텐)의 집을 오가며 파리의 골목을 달리는 그녀의 오토바이에 목적지는 없다. 그녀에게 쌍둥이 오빠가 있고, 비슷한 심장 질환을 앓고있다는 설정은 그저 사소한 우연일 수 있지만, 영화는 장면 곳곳에 추상의 스케치를 더하듯 현실의 내연을 드러낸다. 그건 어김없이 공포의 감각이고, 두려움 속에 묻혀, 드레스 한 벌, 구두 한 켤레와 함께 스쳐지나가고 말지만, 모린은 분명 이질적인 판도라 상자 앞에 서있다. 누군가를 위해 옷을 고르고, 누군가를 위해 드레스의 지퍼를 채우고, 누군가를 위해 힐을 신는 것. 폐션계의 시스템 속에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직업이 되어버린 퍼스널 쇼퍼는 분명 기이한 직업이다. 영화는 그 이질감, 기묘할 정도의 위화감을 끌어낸다. 수도없이 쏟아지는 'Unknown'의 메시지. 영화는 현실을 확장하고, 한 장의 추상화를 그려내듯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응시한다. 보그 지 기자와의 대화에서 모린이 이야기한 '의미를 모르겠다'는 말은, 보이지 않던 ,이곳이 아닌, 어딘가의 자신의 투영된 현실의 언어고, 퍼스널 쇼퍼는 다시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닫아버리려는 현실의 가면일지 모른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파리로, 그리고 오만으로. 1만 킬로키터가 넘는 길의 마침표를 찍는 건 이름모를 지역 어딘가의 방에서다. 죽은 오빠를 찾아 헤매던 그녀가 끝내 만난 건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의 어느 조각이고, 파리, 런던과는 1만 킬로미터만큼 다른 감각의 시간이 그녀에게 비로소 답을 건네준다. 말이 아닌 소리, 문장이 아닌 진동. 영화는 매우 먼 곳의 대답을 더이상 가까울 수 없는 곳에서 꺼내 보여준다. 그 순간의 공포는 희열을 닮아있고, 이유없이 떨어졌던 유리잔은 드디어 이유를 드러낸다. 공포가 희망이 되고, 불안이 내일이 되는 순간.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인 대답을 남기고 영화는 문을 닫지만, 추상화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브제는 이곳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시간을 쌓는다. 나는 왜인지 그곳의 언어가 착각과 망상일 것 같고,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의 언어일지 모르겠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 표면 밖에 자리하는 것들,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들, 그래서 기껏 예술로만 존재하는 것들. 하지만 실은 모든 건 이곳에 있고, 세상은 셀 수 없이 조밀한 입자들로, 하염없이 짧은 시간으로 흘러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아닌 이곳의 여기와 저기. 어차피 세상은 자기 눈에 비친 그림이고, 어느 하나 같은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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