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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05. 2017

믿지 못해 떨구는 눈물,
믿음에 실패한 마음

이상일 감독의 '분노'에 대하여

컴컴한 새벽 단층 주택가 사이를 자전거 한대가 지나간다. 누가 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풍경. 이상일 감독의 <분노> 시작 장면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분노>는 부부 살인사건으로 극의 막을 연다. 바닥과 벽이 피칠갑이 된 집, 욕조 안팎에 널부러진 시체. 잔인하고 처참한 살해 현장에는 분노(怒)란 글자 단 하나가 쓰여있다. 이후 영화는 살인범을 찾는 이야기를 쫓아간다. 오키나와 호시 섬에 돌연 나타난 타츠야(모리야마 미라이), 2개월 전 치바 항구도시로 이주한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 그리고 정처 없이 도쿄의 신츄쿠 니쵸메를 헤매는 나오토(아야노 고)가 용의자로 지목되고,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공간의 서로 다른 세 이야기를 얽어가며 살인범 찾기를 향해 달려간다. 하나의 사건, 세 명의 용의자가 꾸리는 서스펜스 드라마다. 


타츠야와 타시로, 그리고 나오토 용의자 세 명은 모두 신원이 불명하다. 그래서 의심가는 구석이 많다. 영화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꾸려가면서 맞물림의 연출 방식을 택한다. 오키나와의 이즈미(히로세 스즈)가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도쿄의 유마(츠마부키 사토시)의 클럽 음악 신이 겹쳐지고, 도쿄의 유마가 여행가고 싶다고 말한 직후 오키나와 장면이 이어진다. 이상일 감독은 이를 "생활 공간에서 공통점들을 찾아 배치하고 편집으로 각 장면들을 이어나갔다"고 말했다.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연출과 편집은 불명확한 용의자를 더욱 더 헷갈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나 영화가 제시하는 범인의 몽타주는 처음엔 타츠야를 닮았고, 이후엔 타시로를, 그리고 얼굴 오른 쪽의 점 세 개가 지적되는 부분에선 나오토가 범인일 거라 의심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이야기 세 개가 겹쳐짐으로서 감정이 격화된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절묘한 연출과 편집으로 완성해 낸 것이다. 


와타나베 켄과 미야자키 아오이,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야노 고, 그리고 마츠야마 켄이치와 모리야마 미라이. 일본 국내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휩쓴 것에서 알 수 있듯 <분노>는 연기력 탁월한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영화다. 특히나 이들의 역할은 내적인 분노,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휘둘리는 난해한 캐릭터들이다. 이를 위해 아야노 고는 살을 뺐고, 미야자키 아오이는 살을 찌웠다. 더불어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야노 고는 게이 커플의 관계를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실제로 동거를 했으며, 수협의 직원으로 출연한 와타나베 켄은 크레인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연기 노력이 물리적인 것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와타나베 켄은 딸인 아야코(미야자키 아오이)에 대한 애매모호한 감정을 무덤덤하지만 깊은 연기로 표현했고, 츠마부키 사토시는 애인인 나오토에 대한 감정을 자신할 수 없음에 애절한 연기를 펼쳤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오갔던 모리야마 미라이, 깊은 사연을 드러내지 않고 외롭게 담아낸 마츠야마 켄이치와 아야노 고의 연기도 발군이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 속에 서로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불곷처럼 활짝 핀다. 


잔인한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진행될 수록 살인범 찾기에서 멀어진다.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영화가 집중하는 건 믿음, 불신, 그리고 의심에 대한 물음이다. 영화의 결말에 진범은 밝혀지지만 이상일 감독은 그 과정 사이사이에 수많은 의심을 제기한다. 누가 진짜 살인범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믿음 앞에 당당한가? 진실은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가? 실패한 믿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마는 애인을 의심하고, 그로부터 도망갔음에 눈물을 흘린다. 타쿠야(사쿠모토 타카라)는 이즈미를 지켜주지 못해 눈물을 흘리고, 아야코 역시 타시로를 믿지 못해 눈물을 흘린다. 믿지 못해 떨구는 눈물, 믿음에 실패한 마음. 불신이 믿음을 뒤흔든다. <분노>는 범인을 찾아내기에 앞서 우리 맘 속에 잠들어 있는 불신과 의심을 건드린다. 그래서 <분노>는 살인 사건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믿음이 무엇인지, 불신은 또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나아가 타츠야의 분노에 다다른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묘사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암흑 속에 고요히 잠자고 있는 불확실한 감정과 마주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용의자일지 모른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뜨겁고 잔인한 영화지만 <분노>가 분노로 끝나진 않는다. 이상일 감독은 믿음에 실패해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는 유마와 아야코의 모습을 통해, 바다를 달리며 울분을 토하는 이즈미의 모습을 보여주며 '괜찮다'고 말한다. 엄마의 죽음 이후 묘를 찾아간 유마는 나오토에게 "함께 묻히는 거 어때"라고 묻는다. 그리고 몇 신이 지나서 나오토는 "함께는 무리겠지만 곁이라면 좋다"고 답한다. 그리고 바다를 달리는 이즈미의 신에 "다이죠부(괜찮아)"란 음성이 들린다. 믿지 못해 흘리는 눈물,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뜻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뒤와 오른쪽 옆 자리에서 눈물,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영화는 배우들 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관객들을 울렸을 거다. 이는 이상일 감독이 분노란 단어를 통해 제시한 우리의 믿음이 울었다는 뜻일 거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인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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