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현실의 도망일지 몰라도, 어쩌면 도움이 된다.
나쁜 일은 왜 나쁠 때 더 자주 찾아오는지, 이보다 더 할 수 없다는 말은 왜 무색해지는지, 우울은 어디에서 오고, 최악 뒤엔 왜 또 최악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본다. 노기 아키코의 드라마 '짐승이 되지 못하는 우리들'에서 코세이(마츠다 류헤이)가 얘기한 '누구에게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다'는 대사는 후쿠시마 재난 이후 해체된 나날에 대한 초라한 한숨이었지만, 아픔을 이겨내는 건 어쩌면 지친 한숨을 외면하는 도망, 우울을 살아가는 건 아마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지켜내는 일일지 모른다. 올해 가을부터 방영 중인 심야 드라마 '이 만화가 대단해(このマンガがすごい)'는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서랍 깊숙이 넣어둔 작은 용기, 부스러지지 않은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같은 제목의 무크 지를 발행하는 출판사 '타카라지마(宝島社)'가 드라마의 제작을 돕고는 있지만, 사실 내용은 별 상관이 없고, 드라마는 만화에 쌓인 아픔, 눈물, 애씀, 다짐, 그리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삶 속에서 잃지 않는 자신을 담아낸다. 삶에 기댈 수 없는 시간 속에, 다행히도 우리에겐 지나간 시간 속에 품어온 픽션의 세계가 있고, '이 만화가 대단해'는 그 허구의 세계, 삶을 지탱해준 픽션의 품을 그려낸다. 드라마는 아오이 유우가 좋아한다는 아이돌 그룹 '안제루무(アンジェルーム)'의 '蓼食う虫も好き好き(여귀 먹는 벌레도 좋아)'로 시작하고, 그 노래의 후렴구는 '좋아한다면 문제 없어, like it'이다.
모리야마 미라이만큼 변화의 폭이 큰 배우도 많지 않다. 보석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배우이기 이전 모델이었다. 이제야 주목받기 시작한 모리카와 아오이는 작품이 바뀔 때 마다 강박적으로 머리 모양을 바꾸고, 개그맨 출신 배우 덴덴은 100편이 넘는 출연작에도 언제 한 번 주연이었던 적이 없다. 잔인하게도 조연은 쉽게 잊혀지곤 한다. '이 만화가 대단해'는 픽션을 품은 다큐멘터리이다. 매 회 한 명의 배우가 자신만의 만화, '실사화 하고 싶은 만화'를 골라 공들여 한 부분을 완성한다. 나름의 아픔이 나름의 만화를 간직하고, 나름의 우울이 나름의 만화를 적신다. 모리야마 미라이는 '우시오와 토라(うしおととら')라는 만화를 가져와 소년 우시오가 요괴, 토라가 되는, 가장 현실에서 멀리 벗어난, 만화의 순간을 연기하겠다고 말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에겐 '워터보이즈' 이후 '분노'의 시간이 흘러갔고, 그는 두 해 전 소속사 오피스사쿠(オフィス作)를 나와 독립을 하기도 했다. '이 만화가 대단해'는 어쩌면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서랍 속 만화가 살아온 시간의 이야기다. 어릴 적 이지메 경험을 당한 모리카와 아오이는 제목도 애달픈 만화 '일본 히키코모리 협회에 어서오세요(NHKへようこそう)를 가져와 '주인공 미사키의 수수께끼같은 강인함이 자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함께 대화를 하던 아오이 유우는 '연기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연기해온 캐릭터에게 구원받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전한다. 이름이 같은 모리카와 아오이는 올해만 11번의 변신을 했다. 만화는 현실의 도망일지 몰라도, 어쩌면 도움이 된다.
배차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를 타고, 양화대교를 지나려던 즈음, 듣고 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키리타니 켄타와 스다 마사키가 함께 부른 키타노 타케시의 노래 '아사쿠사 키드'가 흘러나왔다. '꿈을 버렸다고 말하지마'라는 대목, 몇 번이나 반복되는 그 부끄러운 울림. 문득 창박을 내다보니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날았고, 별 거 아닌,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 왜인지 거짓말 같았다. 며칠 전 이불을 뒤덮은 채 보았던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쿠사나기 츠요시의 데이트가 생각난다. 히가시데는 '역시 연기를 좋아하구나'라는 쿠사나기의 말에 '연기를 하고 있을 때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라고 말했다. 어딘가 숨어버리는 듯한 인상. '이 만화가 대단해'를 위해 아오이 유우와 만난 자리에서 '(오래 하고있는) 검도를 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때와 닮은 인상. 히가시데가 실사화하고 싶다고 고른 만화는 무라카미 모토카의 '류 론(龍-ロン)'이었고, 그는 고작 몇 장면을 위해 검도장을 찾아 몇 시간이나 땀을 흘렸다. '잘 하지 못한다'는 겸손이 닫아버린 마음, 머쓱함이 지워버린 부끄럽지만 솔직한 기분. 완성된 작품만큼 후반 아오이 유우와의 대화가 보석같은 이 드라마에서 히가시데는 '검도는 연기와 닮아있다'고 말한다. 제작되는 영화의 대부분이 만화 원작, 심지어 순정 만화는 올해만 열 편 이상. 하지만 만년 조연배우 덴덴은 여섯 쌍둥이가 주인공인 아카츠카 후지오의 만화 '오소마츠 쿤'을 골라 여섯 쌍둥이를 연기했고, 순정 로맨스의 이상적인 이케멘이 되어버린 나카가와 타이시는 'ARMS'의 오른 팔을 빌려 최초의 액션 컷을 완성했다. 만화는 왜인지 네모난 프레임의 연속이고, 책을 펴면 날개를 펼친 새와 닮았다고, 노기 아키코의 드라마 '중판을 내자'가 그랬다.
만화가 스크린을 도배하는 시대, 쇄도하는 순정만화 캐스팅에 길을 잃어버리는 배우. 하지만 이건 고작 현실과 돈이 만들어버린 숫자와 결과이고, 만화만큼 현실을 살지 않는 세계는 없다. 현실의 어느 구석에서 현실과 가장 먼 자신만의 세계를 만나, 스탠드만 켜진 어슴푸레한 빛과 함께 눈물을 감추고, 웃음을 떠올리는 시간, 그렇게 해가 뜬 또 한 번의 제로의 시간을 엉금엉금 걸어나가는 날의 기록. 장난스런 안경을 쓰고 안제루무의 춤을 따라하는 오프닝의 아오이 유우는 분명 생소하고 우리가 알던 아오이 유우가 아니지만, 그건 어쩌면 그녀만의 만화일지 모르고, 아오이 유우는 '안제루무는 절대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함께 옷을 사러 가며 노닥거린다는 스다 마사키와 야마자키 켄토는 만화 원작에 뻔질나게 출연하는 배우 1, 2위를 겨루는 사이지만, 야마자키 켄토가 즐겨듣는 노래는 키린지의 애처롭고도 고독한 노래 '에일리언즈(エイリエンズ)'이고, 스다 마사키는 자정이 지난 시간에서야 고향 사투리로 왁자지껄 떠든다 . 안제루무와는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만큼 먼 람프의 노래 '한숨의 행방(ため息の行方)'이 무츠 에이코(陸奥A子)의 만화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알지도 못했던 작가의 만화를 검색한다. 각자의 방에 숨어버린 각자의 만화, 각자의 눈물에 가려진 각자의 용기. 이따금 전해지는 애씀의 기억과 기적처럼 찾아오는 비둘기의 비상. 드라마는 만화 원작의 영화가 폭증하는 현실을 다소 째려보기도 하지만, 어쩌면 필요한 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날개를 펴고, 각자의 시간을 나는 시간일지 모른다. 실사화를 위해 시작된 이야기는 만화의 프레임 안에서 머무르고, 만화는 분명 우리 일상 어딘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