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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09. 2019

'나'를 잃은 '우리',
어쩌면 한국 영화의 질곡


'말모이'를 예매하기까지 여러번 제목을 검색했다. 말로이? 말모러? 말모아? 엄유나라는 생소한 이름의 감독이 유해진, 윤계상과 손을 잡고 만든 이 영화의 제목은 그만큼 생소하다. 1940년대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사전을 만들던 사람들의 이야기란 문장에 언뜻 이시이 유야의 '행복한 사전'을 조금 떠올렸지만, 두 영화는 지금의 한국과 일본만큼 거리가 멀고, 그러고보니 '행복한 사전'의 원제는 '배를 엮다(船を編む), '말모이'는 영화를 보고나니 제목부터 계몽적이다. 물론 '행복한 사전'은 1995년 별 일 없는 한적한 출판사의 뒷방이 배경이고, '말모이'는 일제 시대 말을 위해 싸워야 하는 험난한 시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내 예상이 어긋난 건 영화의 판이한 질감 때문이 아니고, '말을 모은다'는 의미의, '민들레'처럼 아련한 말 '말모이'를 위해 동원된 무수히 많은 폭력과 억울함의 서사 탓이다. '말모이'엔 까막눈에 홀로 애 둘을 기르는 남자 김판수(유해진)가 있고, 창시개명한 아빠를 둔 조선어학회의 류정환(윤계상)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 둘을 무난하게 엮고, 겨울에 피는 동백꽃같은 이야기를 길어낸다. 그 애절함이, 그 애달픔이 '말모이'엔 분명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135분에 이르는 이 영화를 보며 눈시울이 불거진 건 고작 엔딩의 서너 씬 뿐이었고, 그 조차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모이'는 분명 그럭저럭 성공을 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조금도 다르지 않는 서사, 익숙한 갈등과 분한 역사의 반복이 이제는 좀 지겹고, 불편하다. 일본 순사들은 어김없이 '조센진'을 남발하고,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고, 관객들은 아마도 애국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클리셰 앞에서 나는 후진하는 한국 영화를 본다. 사실 '말모이'는 전국의 모든 사투리를 수집하지만, 그를 위해 영화는 그리 분발하지 않고, 아마도 '말모이'를 가장 닮은 김판수의 아들 덕진(조현도)의 서사는 고작 엔딩에서야 싹을 틔운다. '말모이' 같은 민들레처럼 아련한 말이 그 험한 135분 안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다.

이건 어쩌면 한국과 일본의 기질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그저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일본에선 '지금 재미있는 일본 영화는 없다'고 얘기하고, 한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 대중 영화의 침체를 예견하기도 한다. 그저 남의 떡이 나아보이는, 아무것도 아닌 얘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급 이상 대중 영화에서 반복되는 '일제 시대', 소위 '안전빵'에 가까운 시간은 좀처럼 다른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 사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 흔한 영화의 소재가 아니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언어마저 남의 것이 되려하는, 벼랑 끝 작은 조약돌 같은 이야기는, 일제 시대가 길어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이고, 가녀린 서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모이'는 우리가 알고있는, 많이 보고 많이 들어 마음 놓고 결말을 기다릴 수 있는, 그런 또 하나의, 애국심을 추억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의 회원 민우철(민진웅)의 집에 조선총독부의 우에다(허성태)가 찾아왔을 때, 나는 그가 배신을 할 것을 예상했고, 류정환이 위기 전야 사람들을 불러 친일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할 때, 분명 정반대의 공청회가 기다리고 있음을 짐작했다. 마치 투박한 영화의 예고편처럼 '말모이'는 익숙함에 기댄다. 한참 어려보이는 우에다가 류정환의 아빠 류정탁의 뺌을 세차게 갈기고,민우철의 시무룩한 표정이 예고한 총독부의 침략이 시작돼, 무차별 공격과 발포가 이어질 때, 말을 모으는 애절하고 애달픈 말모이의 애씀은 35년의 억압,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반일 정서에 뭉개지고 만다. 영화는 다분히 유해진의 물컹이는 정서와 진득한 유머를 노린만큼 활용했고, 순희(박예나)라는 그야말로 귀엽고 천진무구한 동심에 업혀가는 면이 상당하지만, 정작 '말모이'의 고독하고 외롭고 위태로웠을 시간의 어둠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남아있는 사전 원고를 품에 안고 죽을 힘으로 도망가던 김판수가 총탄에 쓰려졌을 때, 나는 부산행 열차를 타고 원고를 부둥켜 안은 채 자리에 앉아있을 유해진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얼굴을 상상했다. 내게 '말모이'는 그런 영화였으면 했다.

'우리' 순희,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어쩌면 '말모이'는 그냥 너무 당연하게도 '우리'의 영화다. 조선어학회 서점에서 일하는 구자영(김선영)이 이야기한 것처럼, '말모이'는 '우리'로 수렴된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 정신.' 실제로 영화 초반에 언급되는 주시경 선생을 비롯 당시의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공동체 정신'으로 '우리 말'을 지키려했는지 모른다. '나'가 아닌 '우리', '나'보다 '우리'로. 하지만 전국의 사투리를 모아 표준어를 만드는 시간은 하나, 하나의 말들이 모여 하나의 단어를 도출하는 시간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결코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뭉클함을 느꼈던 건 영화의 후반, 덕진과 순희란 이름에 담겨있던 이유, 의미, 사연이 드러나던 장면이고, 그 시간, 그 이야기, 그 사연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누군가의 애절함이, '반일'이란 오랜 질곡의 역사 한 켠에 안착했을 때다. '말모이'는 사투리를 모으는 장면을 코미디로 소비한다. 일제 당시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사용했던 일본어를 오직 저항하고 청산해야 할 오랑캐의 언어로 치부한다. 그 질기고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은 한국 대중 영화에서 아직도, 여전히 제자리다. 그러면서 정작 배우들의 좋지 않은 일본어는 배우의 연기를 침해하는 수준이고, 심지어 나는 신발 끈을 다시 묶다 '죽고싶다(死にたい)'를 '믿고싶다(信じたい)'로 들었다. 자꾸만 일제 시대로 회귀하는 최근 한국 영화, 드라마의, 극의 흐름마저 흐트러버리는 기괴한 일본어는 분명 한국 영화가 시간을 되돌릴 때 풀어야할 숙제다. 오히려 나는 류정환이 가짜 공청회를 하며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영화의 새로움을 기대했고, 시대의 상상력을 기다렸다. 위험을 감수한 상상력은 어쩌면 별로 '우리'에 반하는 일이 아니고, 그저 조금 더 '나의 시간을 돌아보는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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