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연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옷깃을 피해 걷는다.
그럭저럭 일어나 그럭저럭 아침을 먹고 그럭저럭 버스를 탄 날의 이야기. 오랜만에 울린 전화벨에 모르는 번호를 받으니 스팸이다. 소심하지만 어김없이 B형인 나는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고, 상대는 '이거 광고인데요'라며 시치미를 뚝 뗀다. 질문의 물음표를 무색하게 하는 한 마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당당하고 떳떳한 한 마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한 나는 '동의한 적 없다고' 항의했고, 전화는 '이거 광고라고, 바보야'란 말을 던지고 끊겼다. 그냥 혼자 한 번 욕을 해버리고 끊어버렸으면 좋았을 전화, 그저 그러려니 흘려버렸으면 될 이야기. 애초에 '후후' 어플을 설치했으면 면할 수도 있었을 일. 하지만 나는 그냥, 그저 이렇게 흘려버리고 말아야 하는 일들이 산재하는 이 나라가 싫다. 그럭저럭 무너져내린 마음을 움켜쥐고 살아야 하는 이 나라를 좋아할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택배는 물건을 문 앞에 두고 초인종만 누른 채 가버리고, 심지어 그건 야밤에도 일어나고, 플라스틱 사용 제한과 함께 테이크 아웃 컵 사용을 줄이고 있는 카페는 테이크아웃 시 매장에서 바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심지어 거기엔 조금의 양해를 구하는 말도 없고, 그럼에도 음료는 같은 값에, 차가운 음료는 머그 잔에 나온다. 이런 날이면 그저그런 우연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굴러가, 나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벌레가 꼬인다'는 말을 떠올리고 만다. 어쩌면 그냥 각자의 사정,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잘못 건 전화를 사과 없이 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나머지 다리 하나는 아직 버스 계단을 오르지도 않았는데 버스의 문을 닫아버리려는 나라의 이상한 사정을 나는 좋아할 수 없다. 옷깃만 스쳐도 연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옷깃을 피해 걷는다.
'국가 부도의 날'을 보던 날, 벌레가 득실댔다. 아침에 엘레베이터를 코앞에서 놓친 데서 시작된 그저그런 불운은 자꾸만 꼬리를 이어, 먹으려던 수프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주문한 샌드위치는 실패에, 배까지 탈이 나 급하게 찾은 화장실은 한 발 차이로 다른 남자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누구의 탓도 아닌 타이밍의 탓.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나는 하려던 공부를 한자도 하지 못했다. CGV 신촌 5관, 7층 127석 스크린. 이날은 유달리 영화가 시작하고도 꽤나 많은 사람이 입장했다. 여기저기 부스럭 소리가 들렸고, 스크린 여기저기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어느 누구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서 흘러간 몇 분 간의 각자의 사정. 영화는 알려진 대로 1997년 IMF 전후의 이야기다. 뱅상 카셀은 분명 오용이고, 윤정학(유아인) 캐릭터는 아리송해 비겁하고, 다큐가 되지 못한 영화는 끝내 현실을 버리지 못해 다소 허무하지만, 극장에선 여기저기 욕설이 터져나왔고, 나는 이제 각자의 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여신(與信)'이란 이름의 사상누각. 위태로운 모래성을 살아가는 세 무리의 사람들. 누군가는 위기를 살고, 누군가는 기회를 잡아채고, 누군가는 위기를 연명하는 부조리의 시대. 영화는 한 해 사이 40% 넘게 목숨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의 죽음을 해부한다. 금 모으기가 사기극이었음을 고발한다. 자유 경제가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을 폭로한다. 그렇게 우리의 실패가 우리의 탓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남는 건 금이 가고 조각이 난 너와 나의 믿음 信, 누구도 믿지 못해 모두 혼자가 되어가는 타인의 시대, 그렇게 흘러가는 위기와 기회의 아슬아슬한 바통 터치. IMF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아오이 유우가 공감도 0%라고 이야기한 일본 영화 '이름 없는 새(彼女がその名を知らない鳥たち)'에서 토와코(아오이 유우)는 진상이다. 렌탈한 DVD가 고장이라 허비한 시간을 책임지라고 소리 치고, 시계 수리가 늦는다는 이유로 가게 직원을 집까지 찾아오게 하는 그녀는 한국에서라면 TV 뉴스를 떠들석하게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나는 TV에 보도되는 진상들의 사정을 생각한다. 그들 중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진상은 몇 %일까. 세상의 모든 범죄는 공감도 0%일까. 피해자는 정말 피해자이고 그들에게 책임은 조금도 없을까. 동시에 얼마 전 일본에선 디즈니 탄생 90주년을 맞아 14시간을 대기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스다 마사키는 뉴스를 이야기하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기다리기만 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아닐까요'라는 말을 전했다. 개인의 믿음을 지켜주는 것, 믿음과 믿음이 쌓이는 것, 어쩌면 한국은 그랬는지 모른다. 사악한 누군가의 속임수 아래서 애써 믿고 애써 일하고 애써 일어났다 .하지만 그 믿음은 IMF란 이름의 어음이었고, 어음은 구겨진 종이 조가리가 되었고, 영화는 그저 무용지물의 뒤늦은 부고를 전한다. 경제 지표는, 원화 가치는, 환율은 그저 숫자이고 머나먼 이야기같지만, 뒤틀린 숫자는 각자의 사정에서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된다. 마주오는 사람을 위해 길을 비키지 않고, 사과를 하는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지하철 양옆에 사람이 앉았어도 다리를 꼬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피해자일지 모른다. 불신이 불신을 낳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시대에서, 각자의 사정은 생각해보면 꽤나 이기적인 말이지만, 어딘가 외롭고 처연함을 나는 다행히도 아직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