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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02. 2019

그곳에 죽음이 태어났다.
강변호텔

삶의 가장 근원적인 샘플


홍상수의 풍경을 바라본다. 어느 시점부터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않고, 자신의 작은 회사에서 영화를 만드는 그의 영화는 뭉뚝한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어딘가 세월이 느껴지는 글씨를 써내려간다. 그의 영화엔 여기와는 다른 공기가 흘러가고, 보통의 영화라 부르는 것들과도 이상하게 다른 질감을 가진다. 그리다 만 듯한 사람 셋과 전원사라는 단정하고 묵직한 이름. 홍상수의 영화는 모두 이렇게 시작한다. 스물을 갓 넘겼을 즈음, 그의 영화 '생활의 발견'을 보고 영화를 사랑했고, 살아가는 문턱문턱 그의 영화는 왜인지 나의 편이 되어주었다. 홍상수의 스물 세 번째 영화 '강변 호텔'을 보았다. 이 영화는 유독 이상해,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이상해 예고편을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 영화는 영화제작 전원사에서 만들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예고편은, 영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으레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으로 소개될 이름들이 '강변 호텔'에선 영화 초반, (아마도 백현진일 듯한) 남성의 목소리로 얘기된다. '누가, 무엇을, 언제' 만을 담담하고 완결된 어조로 고백한다. 어찌보면 영화사 '전원사' 로고 타이틀에 관한 줄거리. 어김없이 지나간 사건에 대한 기록. 엔딩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강변 호텔 번호 없는 방 초로의 한 남자를 비추고, 나는 흑백 필름 속 숨어있는 베란다 난간 사이 작은 꽃을 바라봤다. 하늘과 땅, 여자와 남자, 삶과 죽음. 어느 때보다도 명징하게 이곳과 저곳을 나란히 바라보는 '강변 호텔'은 지금까지 없었던 '어떤 마지막'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 못했거나, 그러지 않았던 한 걸음. 죽지 않기 위해 '생각'에 몰두했던 경수로부터 16년. 극장을 나와 나는 문득 나의 이름을 머리 속에 긁적여봤다.



눈을 감은 잠깐의 시간, 수북이 쌓여 사방을 덮어버린 눈.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 하늘에선 왜 비가 아닌 눈을 내릴까. 비를 맞이하는 우리와 눈을 바라보는 우리는 왜 다른 마음을 들여다보게 될까. 알 수는 없지만 '눈이 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눈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내리고', '눈은 비와 다르다.' 우리는 가끔 그렇게 하늘을 느낀다. 홍상수의 영화 '강변 호텔'은 어김없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영화다. 그의 영화들이 이곳의 이상한 자국을 쫓아 알수 없는 어딘가를 서성였다면, '강변 호텔'은 어찌해도 버리지 못하는 삶의 어쩌면 희극일지 모를 죽음을 애도한다. '강변 호텔'엔 오래 보지 않았던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양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수고가 있고, 줄 것이 없어도 귀여운 인형 한 쌍을 구해 선물하는 애씀이 있다. 하지만 아들 경수(권해요)와의 통화를 마친 영환(기주봉)은 이렇게 속으로 되뇌인다. '괜한 짓을 한 거 아냐?.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다짐. 이건 홍상수 영화의 언어이고, 그의 풍경 속에 끊임없이 흘러온 죽음의 흔적이다. '강변 호텔'은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은 풍경의 이상한 이야기다. 같은 시간, 같은 호텔의 도저히 만나지 못하는 두 무리의 사람들. 남자의 형체를 한 인간과 여자의 모습으로 자리하는 인간들. 영화엔 수상한 행방불명 사건이 수 차례 일어나고, 메말라가는 식물 너머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둥지를 트는 까치가 있다. 여기와 저기가 서로를 가려버린 풍경들. 지루하게 방치되는 소멸을 걸으면서'강변 호텔'은 잠시 눈을 감고 일어나 수북이 쌓여있는 강변의 눈을 바라본다. 영환의 방 맞은 편엔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누워있다.



2018년 1월 29일부터 2월 14일까지, 두 주에 걸쳐 촬영된 '강변 호텔'은 수상하다. 강변의 호텔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이 영화엔 여기와 저기가 아무렇지 않게 뒤섞이고, '나란히 병'을 쓰는 병수의 이름처럼 위아래에 흐르는 수평의 물과 같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질감의 생경한 풍경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강변 호텔'은 그저 옆에 자리하는 강변의 17일을 걸어간다. '강변 호텔.' 두 아들은 같은 카페에 앉은 아빠를 보지 못하고,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등 뒤에 앉은 여자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들을 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영환의 바로 오른 편엔 상희(김민희)가 밖을 내다보고 있지만, 둘은 그저 같은 층에 자리할 뿐 엄연히 다른 여기와 저기이다. 이 보지 못함의 이상한 풍경이 '강변 호텔'을 홍상수 영화의 새로움으로 만든다. 어찌할 수 없는 엔딩으로 끌어낸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전작 어딘가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흔적을 느끼곤 하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한 프레임 안에서 묘하게 어우러지며 기묘하게 아름다웠던 엔딩의 '풀잎들'을 생각하면, '강변 호텔'의 여기와 저기는 어김없이 이곳에 흘러가며 영화적 결실을 맺어낸다. 나는 이를 삶의 성취라 말하고 싶다. '강변 호텔'엔 홍상수의 인장과도 같은 반복의 메타포는 없고, 줌인과 아웃 사이 기이하게 달라지는 긴장의 삶이 흐른다. 비루한 남자들의 어리석은 실패를 뒤로, 희정, 영희, 만희, 아름,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여자, 김민희의 몸을 빌려 이곳이 아닌 어디, 여자의 품을 방황했던 홍상수는, 실패한 남자의 마지막 며칠에서. 그의 아마도 가장 최선일 길을 바라본다. 고작 몇 걸음 사이, 바로 맞은 편 방에 움트고 있는 보이지 않던 삶의 풍경. 상희와 연주(송선미)가 밖에 나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눈이 쌓여있다'고 말할 때, 영환은 감았던 눈을 뜨니 '두 분이 보였다'고 얘기한다. 그가 적은 기나긴 시는 '눈이 옵니다'로 시작한다.



'강변 호텔'은 어쩌면 사실 그저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호텔 방 바닥에 양손을 짚고 기묘한 자세로 담배를 물며 골몰했던 영환은 영화의 마지막 무렵, 두 여자, 상희와 연주 곁에 다가와 자신이 쓴 시를 읊는다. 두 아들, 경수와 병수가 자를 타고 떠나가고, 이상하게 커다란 버스가 굉음과 함께 뒤를 따르고, 어딘가에 있던 영환이 가게에 들어가며 이어지는 이 장면은 묘한 질감의 리듬으로 시를 읽기 시작한다. 여러번의 여기와 저기를 거쳐, 시간으로도, 공간으로도 설명되지 못하는 기묘한 무언가에 도달한 영화는 소주 몇 잔과 함께 '죽어도 좋다'고 얘기한다. '이 카란 조직'으로 시작하는 시엔 조금의 은유도, 상징도 없고, 그저 '사람 짓을 하던 사람'의 '잊고있던 하늘'이 슬픈 눈물을 흘린다. 영환의 말들은 두 아들과 함께 있을 때와 달리 확연히 눈에 안달이 난 어린이나 강아지를 닮아있고, 호텔 방에 돌아와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누추하지만 애씀과 피로의 흔적이다.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고, 그건 어쩌면 '두분과 꼭 술 한잔 했으면 한다'는 영환의 바람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 흔해빠져 낡아버린 그 말. 슬픔도, 기쁨도 아니고, 슬픔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한 말. 연주는 '아름다운 말이네요'라고 말하고, 어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카페의 직원과 식당 주인을 제외하면 남자 둘과 여자 둘, 그리고 영환만이 등장하는 '강변 호텔'은 어딘가 삶의 근원적인 샘플을 연상케한다. 하루와 고작 두 번의 아침을 담고있지만 강변을 끊임없이 거니는 영화는 여기와 저기를 횡단한다. 영환의 갑작스런 죽음은 돌연스런 사건이지만, 병수는 그 죽음을 조금은 알고있었고, 맞은 편 방에선 병수가 아닌 병수, 경수가 아닌 경수가 구슬픔에 몸을 떨고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하나의 죽음이 끝났을 때, 아마도 영화 중 가장 짧은 엔딩 크레딧이 끝나버렸을 때,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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