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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01. 2019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I HATE JESUS가 아니다

어느 구멍 너머의 어제, 오늘.

I (don't) HATE JESUS

'I HATE JESUS'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를 영어로 옮기면 당연히 이렇다. 지난 5월 일본에서 개봉해 세계 몇 곳의 영화제를 돌고 작은 화제를 모았던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어김없이 'I HATE JESUS'가 될 꼴이다. 별 다른 수사도 없는 이 문장에서 번역은 사실 망설일 이유가 별로 없다. 하지만 영화의 원제는 'I'가 아닌 '僕', 'JESUS'가 아닌 '神様'로 채워져있고, 단 두 단어의 차이로 문장은 전혀 다른 뉘앙스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화에서 초등학생 주인공 유라가 내뱉는 대사는 아니지만, 이 영화 제목엔 어린 아이의 심통 어린 투정 같은 감정이 묻어난다. 실제로 감독인 오쿠다 히로시는 영화제 출품을 코앞에 두고 제목을 꽤나 고심했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가 강한 유럽, 미국 등의 나라에서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고,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고작 23살 감독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완성해낸 76분의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왜인지 'I HATE JESUS'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영화의 포인트가, 힘이 자리한다.  

영화는 도쿄를 떠난 소년의 눈속 마을에서의 며칠을 그린다.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별장에 놀러가게 해주세요'같은 초등학생 특유의 유치하지만 절대적인 기도로 채워진다.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는 학교, 성당에 모여 두 손을 모으는 게 조례가 되어있는 학교, 전교생 다 모아봐야 서른 명 안짝이지만, 빈틈 하나 없는 눈으로 덮혀있는 시골 학교. 그렇게 완벽한 순백의 세계에서, 주인공 유라는 생각 외로 학교에 쉽게 적응하고, 식탁에서의 몇 마디를 제외하면 영화에 들려오는 어른의 낯선 발걸음은 별로 없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힌 산속에서 그네를 타고, 뛰고 넘어지고, 뒹구는 유라와 카즈마(오오쿠마 리키)만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세계는, 왜인지 어쩌면 완벽하다. 오쿠다 감독은 부러 고전 영화에나 쓰였던 1.33:1의 스탠다드 화면을 골랐는데, 그만큼 영화는 도쿄에서,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이 비율의 화면은 최근 '고스트 스토리'의 데이빗 로워리 감독이 쓰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나는 이 제목의 의미를, 어느새, 이미 잊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라의 예수님은 작다.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 호시노 유라(사토 유라)의 예수님은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다. 유라가 작은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으면 마치 피터팬의 팅커벨이 날아드는 것처럼 나타나 유라 앞을 맴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던 십자가 속 비애의 초상이 아니고, 정해진 틀 속 성스러운 모습의 상징도 아니다. 오쿠다 감독은 예수님을 두꺼운 성서책이 아닌 유라의 작은 일상 안에 그려낸다. 1000엔짜리 지폐로 접은 스모 선수와 대결하는 모래밭(물론 유라가 장난스럽게 마련한 책상 위의 작은 무대)에 올려두기도 하고, 신사에서 합장을 하며 소원을 비는 유라 곁에 질투를 하는 장난감처럼 서성이게도 한다. 예수님이 강림하는 보통의 영화라면, 신비롭고 성스러고 장엄할 이 장면이 '나는 예수님이 싪다'에선 유독 코믹하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응은 일본 내외를 망라해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묘사'였다고 한다. 그저 어린 아이 눈에 비친 예수님이라 할 수 있겠지만, 믿음은 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는 결코 코미디가 아니다.

유라의 단짝 친구 카즈마(오오쿠마 리키)의 엄마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정치가가 되고, 300만엔의 월급을 받고, 30만엔의 건물을 사는 인생 게임은 왜인지 항상 골에 이르지 못한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아빠가 함께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은 조금 과장해 성서 속 최후의 만찬처럼도 보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기시며...아멘.' 온통 성가만이 흘러나오는 영화에서, '아멘'으로 마침표를 찍는 문장에 밖을 내다볼 틈은 어디에도 없다. 창 안쪽 세상 만으로 완전하다. 하지만 곧 끝나버릴 계절, 자꾸만 늘어나는 창의 작은 구멍들. 영화는 어느 노인의 알 수 없는 흥얼거림으로 시작했다. 삶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이미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듯한 노인은 유라의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는 장면이 지나간 뒤, 컷 이후 이곳에 자리하지 않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며시 창에 구멍을 내는 순간 이후. 영화의 마지막, 유라는 이른 새벽 새로 곱게 바른 창에 살며시 구멍을 내고, 나는 유라의 웃음에서 드디어 한 세상이 문을 닫고 문을 여는 기분을 느꼈다. 무엇에 눈을 뜨고, 무엇에 눈을 감을것인가. 삶이란, 그리고 믿음이란.


영화엔 어쩌면 일찍 세상을 든 오랜 친구와의 재회를 바라는, 기도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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