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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11. 2019

물을 바라보는, 뭍의 오만함

이타미 준의 바다에 관한 잡생각


물을 바라보는 뭍의 거만함

대상에 대한 열정은 작품을 어디까지 완성할까. 대상에 쏟아부은 시간의 양은 작품을 어디까지 끌고갈까. 이타미 쥰의 삶을 돌아보는 영화를 보며 잡생각을 했다. 2011년에 시작해 이타미 준의 시간을 줍고, 모으고, 보여주는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방법을 잘못 만난 건축물처럼 삐걱삐걱 다가오지 않는다. 이타미의 어린 시절을 재현하듯 어린 소년이 등장해 바다, 산을 노니는 장면은 솔직히 웃을 수 밖에 없었고, 나레이션을 맡은 배우 유지태는 왜인지 이타미 준, 유동룡 1인칭의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픽션, 재연을 가미한 다큐멘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없다고 해도 방법이 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타미 준의 바다'는 '다큐멘터리'에 조금의 거리도 두지 않는다. 마치 이타미가 얘기하듯 딸들의 말들을 늘어놓고, 특히나 아빠의 길을 이어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는 그 장녀의 말들은 인간적으로 의미가 있어도, 영화로서 별 다른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심지어, 어릴 때, 청년 시절, 그리고 노년의 이타미 준을 재연 배우를 캐스팅해 촬영하는 방법을, 감독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했을까. 멀리서, 어떤 거리를 두고, 객관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여기엔 조금도 없다. 동경에서 태어난 조선인, 의지할 건 고작 집앞의 바다 뿐이었던 사람, 조선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어, 심지어 '난 아무엇도 아니야'라 울부짖었던 인간이 찾은 소위 '고향'이란 건, 대나무로 짜여진 벽 사이로 흘러드는 빗살 만큼, 희미하고 강렬하게 빛나는 무엇이었을 텐데, 영화는 초반부터 한국의 오래된 동요를 울려대고, 누런 간이 한복을 입은 소년을 등장시키고, '고향'의 진부한 애수로 질컹하게 뭉개놓는다. 노년의 이타미 준이 너무나도 본인과 흠사해,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가 촬영을 시작한 2011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감독은 부고에 '진작에 만나뵐 걸 그랬어요'라고 한 인터뷰에서 답했다. '다큐멘터리'가 시점의 아트라고 할 때, 이 영화는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유지태는 마치 이타미 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누가 언제 듣고 어떻게 옮긴 것인가. '재연'에는, 최소한 다큐멘터리에서 무엇보다 큰 책임감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대상에 몰입된 사람이 무작정 들이미는 사랑 얘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단 세 장면. 이타미 준이 육성으로 한국어로 전하는 '사랑해요'라는 부분, 그리고 혈연도, 국적도 아닌 그저 서로 닮은 물방울이어서 만날 수 있었던 두 남자와의 장면만을, 나는 '이타미 준의 바다'라고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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