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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17. 2019

완벽하지 않아 완벽한 세상

어쩌면 '오늘'이란 이름의 픽션, 돈 워리.


오래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는 내게 '구멍'이 생겼다고 얘기했다.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던 만큼 '슬픔'이란 말은 너무 멀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마음 맨바닥을 무어라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는 진부하고 바랜 말의 풍경이 설마, 내게 찾아왔다. 서울에 올라와 두 번째 여름,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보면, 드라마나 TV를 보면 빠져버리는 '구멍'이 있다. 사람 허리 정도 되는 높이에서 바라보는, 어느 중간 즈음의 풍경. 세상의 많은 일은 시간이 흘러봐야 알게된다는 걸,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버린 지금에야 알 것 같은 나는, 수 십일간 눈을 뜨고 바라봤던 그곳이 나의 구멍이었음을 이제야 느낀다. 구스 반 산트의, 왜인지 가장 그 답지 않은 영화에서 그 구멍의 앵글을 만난 건 세월의 우연일까, 남아있는 어제일까. 내가 있는 곳을 아는 것만으로, 세상은 어쩌면 나쁘지 않다.  

오리곤 주 시골 마을에 사는 존 캘러헌(호와킨 피닉스)은 속된 말로 막 살던 남자다. 촌구석 생활의 답답함을 술로 풀고, 그만큼 삶을 잊은 폭주의 나날이 비틀비틀 휘청댄다. 여자를 꼬시거나, 술을 마시거나, 맥주나 샴페인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독한 위스키를 휴대하는 그의 일상은 술로 시작해 술로 끝이 난다. 그리고 정점의 교통사고. 미국의 만화가 존 캘러헌의 실화를 영화로 가져온 '돈 워리'는 꽤나 단순한 스토리다. 알콜 중독자의 갱생, 어제를 후회하고, 뒤늦게 반성하고, 힘겹게 그려내는 내일. 하지만 '돈 워리'는 오늘을 얘기했다 어제를 얘기하고, 내일을 얘기했다 어제를 돌아본다. 보통의 갱생 스토리가 취하는 일직선의 시간을 비틀어, 어제와 내일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금 여기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찾아올 가능성의 한뼘을 그려낸다. 병실 침대의 구멍 속 앵글에선 결코 보이지 않았을 그림. 나는 이 영화가 어쩌면 '오늘'이란 이름의 픽션이라 생각했다.


이틀 전 새벽 갑작스레 눈물이 터졌다. 곰돌이를 보내고 3주 정도. 병원에선 그렇게 울고도 몰랐던 괴물같은 감정이 뒤늦게 터져나왔다. 병실 속 가냘픈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시술대에 올라 안절부절, 어찌할바 모르고, 작은 몸으로, 네 다리로, 마구 울부짖던 곰돌이 머릿속 어딘가에 들이닥쳐 떠나가지 않았다. 지금이 그 날이었다면, 이 새벽의 내가 그날 밤의 나였다면. 최소한 그 늦은 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선택을 나는 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조금의 생각도 없이, 울음에 지쳐 망연자실 해버리고 말았을까. 늦은 새벽 불안한 마음에 작은 소리로 미안하다 아무리 외쳐본들, 세상은 이런 걸 그냥 후회라고 말한다. 무책임. 무미건조. 궤변. 자기 변명. 그날 밤의 후회를 후회할 수 있는 날은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나는 또 다시 이기적인 바람을 기도하며 두 눈을 감앗다.

영화는 여기가 아닌, 너머의 앵글로 시작한다. 사는 게 허무해 나체로 동네를 걷고 경찰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존이 아닌 어느 알코올 중독자의 것이다. 그곳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뚱뚱한 여자가 있고 가정 불화에 마음을 닫아버린 30대 남자도 있고, 삶이 무료해 옷을 벗어버리고 마는 중년의 여자도 있다. 술을 끊기 위한 챌린지라는 공통항이 있지만, 영화가 그리는 건 서로 다른 삶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여기와 저기의 풍경이다. 중독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수도없이 봤을 이 프레임이 왜인지 이제야 사무쳤다. '같이 얘기하면 좀 나아요', '털어놓아야 좋아요'같은 흔해빠진 말들이, 왜 하필이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고여있는 또 하나의 구멍을 만나는 일. 돌연 갇혀버린 앵글에서, 내게 매몰된 시간에서 너머를 바라보는 일. '의미를 찾고 싶었지만, 세상, 사는 거 사실 별 의미 없을지 몰라요'라는, 영화 첫 대사에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그 구멍 밖을 바라보는 게, 그렇게나 힘든 시절이 왜인지 이곳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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