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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18. 2019

IC, 왜 공감되고 XX이야, 엑시트

이렇게 생활감 넘치는 시대극을 뿜어내는 한국이다.


보는 영화의 수가 현격히 줄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보고싶은 영화의 편수가 줄었다. 오래전 학교에 다닐 땐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보겠다는 이상한 목표가 있었는데, 이미 2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니 아무런 관계는 없고, 아무튼 줄었다. 믿고 보는 감독의 타율(어디까지나 내 기준 상에서의 타율)도 어긋나는 일이 잦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는 꽤나 먼 곳의 영화라는 느낌의 작품이 늘어가기만 한다. 게중에 그래도 보게되는 영화들은 누군가와 함께 보는 영화, 추석이나 설, 긴 연휴에 어쩌다 이야기가 맞아 찾는 CGV이거나 롯데 시네마.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와 보게되는 블록버스터다. 이럴 때면 영화는 이후의 저녁이나 엄마가 오래 앉아 계셔도 불편하지 않을 자리, 영화관까지의 동선이나 끝나고 따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한 주변의 이모저모가 되기도 하고, 나는 고작 몇 시간 전의 나를 어딘가에 대충 접어 숨겨버린다. 그렇게 지난 설 '그들만의 세상'을 봤고, 거실에 모여 '허스토리'를 봤고, 며칠 전 뒤늦게 '엑시트'를 봤다. 조정석과 윤아. 영어 EXIT를 한국어로 써버려 왜인지 못생겨진 타이틀. 중소도시의 생활감 뭉개놓은 듯한 색감의 포스터와 예고편. 그렇게 끌리지 않는 영화를 보았다. 둘째 누나와 막내 누나, 그리고 엄마와 나. 이렇게 옹기종기, 나란히. 나는 5분도 되지 않아 울컥였고, 유치하게도 세상엔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촌스러운 액션물이란 것 외엔 조금의 정보도, 아니 선입견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본 영화 '엑시트'는, 설마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였다. 알고보니 감독의 실제 생활에서 많은 걸 가져왔다는 이 영화는 백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보이지 않는 감정 사이사이, 굴곡굴곡의 우여곡절을 섬세하게 잘도 파고든다. 한량처럼, 실제 한량이기도 하지만, 동네 놀이터에서 고작 철봉으로 온갖 무예를 선보이는 첫 장면은 기술의 난이도는 어디가고 실소만 터져나오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옆 동의 할머니가, 나는 그렇게나 싫었다. 경비원 아저씨거나 어제 그 할머니거나. 백수의 라이프 패턴은 돌연 보조기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과 포개지고, 행동 반경은 수시로 단지 곳곳을 살피는 경비원 어르신들과 교차한다. 그 거북한 우연의 애달픔이 영화 '엑스트'에 있다. 영화에선 삼촌을 삼촌이라 부르지 못하는 조카의 해맑은 비수가 장난처럼 등장하지만, 백수가 되는 순간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천근만근 억겁의 무게가 된다. 엄마가 이제 제사 때 큰댁에 가지 않겠다고 얘기하셨던 날, 나는 그 이야기가 애통하게 기뻤다. 하필이면 가족 구성도 비슷해, 형제가 있다는 건 백수에게 도움이 되는만큼 아픔도 된다. 누나들이 대신 해준다는 건 살아서 다행이지만, 그 와중에 나는? 인간은 하필이면 비교하고 마는 동물이다.  

영화는 누군가의 화약 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백수 용남(조정석)과 허울만 좋은 부점장 의주(윤아)의 분투기를 그린다. 엄마 칠순 잔치에 모인 사람들과 돌연 빌딩에 갇혀, 스멀스멀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탈출하는 험난한, 전형적인 재난극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심은 애초 거기에 없어 영화는 수 년째 동네 놀이터와 방구석을 루프하는 용남의 EXIT를 향해 질주한다. 하필이면 등산 동호회가 적재적소 기술과 체력으로 활약하고,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용남의 말같지도 않았던 말은 탈출을 성공시킨 영웅의 지친 한 마디가 된다. 아마도 근래 대중 영화 중 가장 많은 무리수를 두고있는 '엑시트'는 그만큼 현실을 초월한 오락 액션이지만, 그 기둥을 쌓고있는 건 어김없이 지금 이 시대 여기저기의 질펀한 풍경이다. 비상구 관리 문제, 미세먼지, 직장 내 성추행, 갑질 등 마치 9시 뉴스를 갈무리하듯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걸 일으켜 세우는 건 몇 백 kg의 차를 들어올려 소녀를 구해낸 시민들, 중년 여성을 살려낸 동네 사람들, 온 국민이 심폐소생술을 구사하는 건 아닐까 싶게 자주 들려오는 선의가 이뤄낸 기적 속 이곳저곳의 사람들이다. 그만큼 울퉁불퉁 덜컹대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이곳을 놓지 않으려는 애씀이 촌스럽게 뭉클했다. 소외된 이가 바라본 세상의 결실이여서였을까. '제발 내 말 좀 들어줘'란, 용남의 외침이 아직도 마음에 일렁인다. 이렇게 생활감 넘치는 시대극을 뿜어내는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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