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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05. 2019

잠시 잊어야 할 이야기,
'파도치는 땅'의 기록들.

내가 아닌 나에게,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죽음은 그리 멀지 않다. 갑자기 세상을 뜰 수 있고, 그 이유는 천차만별 무수하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살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누군가가 너무 좋을 때, 일상이 극도로 힘이 들때, 반대로 누군가가 너무 미울 때도, 죽음은 가장 쉽게 떠오르는 두 글자다. 끝, 마지막, 사라짐, 공포, 그 자체를 의미하는 죽음은 왜인지 은연중에 아무렇지 않게 스쳐간다. 이런 걸 때때로 우리는 그냥 농담이라 얘기한다. 제제 타카히사 감독의 '고독사'를 보고 촌스런 엔딩에 안도를 했다. 임태규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파도치는 땅'을 보고 10년 전 죽어버린 아빠를 떠올렸다. 10년 넘게 연을 끊고 살던 아빠의 육체가 온기를 잃고 소각로 안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흐르고 죽음이란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 무게를 업고 엄습한다. 영화는 임태규의 전작보다 느슨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아직까지 사무친다. 아빠가 위독하단 전화를 받고 난 택시를 타지 않았고, 흔히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화장터에 가 '파도치는 땅' 속 문성(박정학)이 되기까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 때때로 납골당에 가 아빠 앞에 서면 왜인지 기분은 침묵에 가라앉곤 했지만, 그건 금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둠이 드리운 용산역을 걸어, 전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아빠가 보고 싶었고, 나도 모르게 집에 빨리 가고싶었다. '고독사'는 '친구를 두 번 죽였다'는 고등학생 나가시마(오카다 마사키)의 말로 시작하는데, 나는 10년을 모른척 하고 살았다. 이 보다 더 촌스런 삶이 어디있나 싶고, 아빠가 남기고 간 죽음, 그 사라짐의 시간을 조금은 더 안고싶었다.   

한국말로 옮겨진 제목이긴 하지만 '고독사'를 보고 끝자락의 고독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많은 것이 멀어지고 죽음만이 남아있는, 생의 단 한 번 뿐인 쓸쓸한 시간. 아직 가보지 못해 알 수 없고, 막연하게 무서워 등돌리게 되는 시간.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스물 셋의 오카다 마사키이고, 원제는 죽음이 자리하지 않는, 무려 생이 생으로 이어지는 다소 뻔뻔한 세계를 품고있다. '아노토키노이노치(アントキノイノチ)', '그 때의 삶'이라는 뜻. 하지만, 빨리 반복해 말하다 보면 인기 프로 레슬링 선수의 이름이 되고마는 제목. 영화는 전반과 후반을 뚝 잘라 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다른 무게와 질감이 선명하고, 초반의 폐쇄된 우울을 180도 뒤집는 결말이 나는 아직도 내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집 마루에 찢어진 교복과, 그 가슴에 꽂혀있는 큼직한 가위. 죽음의 잔해를 바라보듯 지나간 카메라가 비추는 건 파란 하늘 아래 지붕에 앉아있는 맨몸의 미청년. 원작 소설의 표지를 그대로 가져온 이 장면은 청량한 하늘 아래 홀로 태어난 누구가처럼 티 하나 없이 맑고 아름답다. 그는 살인을 고백하고 있고, 죽음을 다짐한다. 이게 영화 시작 단 5분만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미 죽음은 시작되었고, 지금도 죽음은 어딘가에 있고, 우리는 그저 농담으로 죽음을 대신한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듯.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죽을 땐 누구나 혼자이고, 그렇게 고독하다. 어울리는 듯 싶지만 혼자이고, 웃고있지만 울고있는 나가시마(오카다 마사키)의 지금에서 과거를 종종 바라보는 영화는 고독을 위해 시간을 쌓아간다. 무리가 아닌 혼자가 되고, 죽음이 오기 전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타인 속 나의 흔적을 찾기위해. 안토니오 이노키는 안토니오 간지가 레슬러가 되고 지은 두 번째 생의 이름이다. 

고독사는 근래 몇 년 이슈가 됐고, 도시화와 시골의 소외에서 비롯된 문제로 얘기돼지만, 일본에선 이미 80년대 그 말이 시작됐고, 생각해보면 이건 태어난 이상 어찌할 수 없이 맞이하는 당연한 순리의 한 굴곡이다. '천국으로 이사를 도와주는 가게', 말도 안되는 이 이름의 회사에서 나가시마는 일을 시작한다. 세상을 뜬 사람의 집을 찾아가 유품을 정리해주는 일은 고독사 시대가 빚어낸 새로운 직종이지만, 영화가 그리는 건 죽음이 아닌 사라짐 이후 바라보는 삶이다.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 귀중품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불필요 박스'에 들어가버리는 시간과 시간들. 외면됐지만 홀로 존재했고, 쓸쓸히 살아왔던 시간의 기억은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진동하는 죽음 이후의 방을, 누군가가 어김없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생의 방으로 떠올린다. 사실 죽음은 보이지도 않아, 이미 나는 몇 차례 죽었는지 모른다. 갑작스레 병원에 들어갔을 때라기보다 불현듯 생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죽어도 기침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기침이 나왔을 때가 아니라 죽을만큼 소외감이 닥쳐왔을 때, 원하던 목표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라기보다 시계를 볼 때마다 44분이었을 때. 나가시마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의 살인을 고백하지만, 진짜로 죽음이 찾아오는 건 영화가 마지막에 달해서고, 그가 끝나버린 누군가의 곁에 존재했던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때의 생'이란 제목을 생각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죽음을 밟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잘 살고 있나요?(元気ですか?).' 영화에도 등장하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 명언은 사실 지나간 자신에게 보내는 인사가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아닌 나에게 눈물을 흘렸다. 

https://youtu.be/eOc_Z4G-h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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