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논픽션, 그 한자의 무력함.
정치가 시대를 잠식하는 시절에, '신문기자'가 개봉했다. 사지 말고, 가지 말고, 일상이 정치가 되어버리는 판국에 이 영화를 본다는 건 어쩌면 싸움판에 뛰어드는 꼴인지도 모른다. 아베 정권의 스캔들을 바탕으로 2017년 신문 기자 모치즈키 이소코가 써내려간 동명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영화 '신문기자'는 태생만큼 묵직하다. 개봉 당시 수 차례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되는 사이버 공격을 당했고, 국내에선 인기 여배우들이 역할을 마다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감독을 맡은 후지이 미치히토는 기자, 관료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내각정보조사실에선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우리의 안기부, 공안같은 곳이다. 영화는 정부가 언론을 조작하고, 세상을 주무르는 일련의 악행에 관한 이야기이고, 영화가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이 시절의 극장 풍경이 무색하다. 우리가 그들을 모르는 것만큼 그들도 우리를 모르고, 그래도 영화는 픽션이라 가끔은 그곳이 더 현실처럼 느껴진다. '신문기자'는 애초 픽션으로 봉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고, 후지이 감독은 그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을 과감하게 옮겨냈다. 이 작품이 영화인 게 다행이고, 씁쓸하다.
영화는 제목답게 저널리즘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정색을 하는 영화가 아니다. 초반부터 신문 기자 요시오카(심은경) 방에 켜진 TV 속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저널리즘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도쿄 전체를 내려보는 부감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 모든 일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일상의 껍데기에 불과함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건 기자란 직업의 이야기가 아닌, 이 시대에 사람이 지켜나가야 하는 긍지에 관한 영화'라고 얘기했듯, 영화는 조직이 아닌 개인, 디테일한 생활과 고민, 갈등을 축으로 움직인다. 정부를 중심으로 관료, 그리고 언론이 커다란 세 축으로 보여도, 영화는 한 발 물러나 현실에 가려진 현실을 살펴본다. 올곧은 기자였지만 너무나 올곧아 내몰린 기자, 외교관이었지만 자의와 상관없이 정부의 음모에 동참하고 있는 공무원, 100여년에 이르는 저널리즘의 두터운 벽과 더불어 SNS로 불거진 타인에 의한 시대의 조작은 개인의 의지를 시험한다. 영화는 그 위험한 마지노선을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고, 그렇게 영화이기를 포기하려 한다. 마츠자카 토오리의 지극히 인간적인 애씀의 얼굴은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의 카세 료를 떠올리게 할 만큼 울림이 크다. '신문기자'는 일본에서 현재 33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1만부 제작됐던 영화 팜플렛은 품절되어 증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픽션은 어쩌면 현실을 움직인다.
영화의 화살은 여지없이 정치의 남용을 향하고 있다. 충분한 근거가 모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구도를 만들어가는 부분은 다소 극으로서 아쉽기도 하지만, 근래 일본에서 이렇게나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영화는 아마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엔 정치를 삶과 분리하려는 진중함이 있고, 조직의 움직임이 아닌 개인의 움직임을 드려다보려는 애씀이 있다. 갓 태어난 딸과 아내, 단란한 세 가족의 내일과, 침묵을 깨고 진실에 다가가는 위험한 내일 사이에서 스기하라(마츠자카 토오리)는 무력하고, 영화는 보채지 않고, 아빠를 위한 어쩌면 복수일지 모를 길을, 요시오카는 감히 강요하지 않는다. 웬만한 대중영화라면 또 한 번의 타격을 가하며 호쾌롭게 마무리를 지었을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신문기자'는 저널리즘의 시선에서, 예고된 객관의 자리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현실'을 선택한다. 고작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남녀의 거리는 멀고도 멀게만 느껴지고, 도시를 관망하는 듯한 부감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스기하라와 요시오카, 이곳과 저곳의 나와 너의 형용하기 힘든 얼굴로 마침표를 찍는다. 수없이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다시 그 자리. 또 그런 현실. 논픽션과 픽션. 현실이란, 그 단 한 자를 덜어내기가 이렇게나 힘든 시절에, 그 무력한 엔딩의 메시지는 묵직하다. 우리는 최소한 '나', '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