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잠식한 AI 월드에서, '너'는 내 반쪽이 되어있었다
말은 때때로 얼마나 교활할 수 있을까. 말은 얼마나 완전하고, 또 동시에 취약할까. 아마도 10여 년, 시간이 흘러 다시 본 스파이크 존스, 아니 호와킨 피닉스의 ‘그녀'는 내게 어김없이 수많은 말들에 관한 영화였다. 연인들 사이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회사의, 불특정 ‘그녀'에게 보내는 말들로 시작하는 영화는 수많은 남녀 관계를 (말들로) 지휘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관계는 챙기지도 못하는 이별 1년차 테오도르의 건조한 일상에 이야기를 편다. 애매한 거리감의 친구 여자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와 조금 더 애매한 남자 친구 폴(크리스 프랫)과의 얼마 되지 않은 친분이 있지만, 그는 대부분 혼자이고, 테오도르가 대화을 건네는 상대는 의뢰인 편지 속 타인이거나 가슴 포켓에 쏙 들어가는 ‘인공지능 운영체계' 단말기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먼 현실이거나 현실의 ‘것'이 아닌 현실같은 것들. 그래서 그는 대부분 우울해 보이는데, 테오도르는 1년 전 이별 한 캐서린(루니 마라)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상실을 품은 남자의 현실을 떠도는 말들, 알맹이를 잃어버린 껍데기의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 이보다 더 명료하게 태어나는 외로움이 있을까. 아케이드 파이어의 몽환적 사운드가 현실을 밀어내는 가운데, 사랑은 떠나고 없는데 말은 잘만 흘러나온다.
테오도르의 ‘현실로서의 일상’은 빈틈 투성이이지만, 동시에 꽉 채워져있다. 편지 대필이라는 다소 올드한, 아날로그적 감성에 뿌리를 두고있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어딘가 미래의 세계처럼 느껴지고, 시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테오도르가 살고있는 곳은 펜 없이, 키보드를 켜고 타이핑 할 필요도 없이 편지 한 장이 뚝딱 쓰여져, 발송까지 되어버리는 ‘익명의 세계’이다. 아마도 인공지능 기술이 지금의 2, 3배 정도는 발달된 시대에서 구현되었을 법한 테오도르의 일상은 혼자할 수 있는 일들을 보다 빨리, 더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고, 나아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하는 ‘인간 밖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멀어진, 그렇게 외로운, 하지만 월등한. 아케이드 파이어, 카렌 오, 킴 딜 등의 사운드 트랙을 사용한 영화의 정서는 대체로 외로움과 우울인데, 스파이크 존스는 화면에 뿌옇게 드리운 잿빛을 좀처럼 거둘 맘이 없다(호와킨 피닉스의 짙은 핑크빛 셔츠가 오래 회자된 이유는 분명 이 비쥬얼적 디자인에 있다). 어떠한 상실의 풍경. 인간을 대체하는 무수히 많은 첨단 기술들과의 생활에서 인간(캐서린)이 떠나간 빈자리. 테오도르의 사무실엔 매일같이 남녀의 사연이 낭송되지만 그곳에 실체는 없고, her, 그녀란 인칭대명사의 이 제목은 돌연 존재에 대한 물음, 실재와 감각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미묘한 연애가 되어버렸다. 사랑이란, 어쩌면 ‘의심'으로 태어나는 감정이었을까.
“살면서 겪을 모든 감정을 이미 알아버렸는지 몰라요.” 이 문장을 나는 어딘가에서 들은, 혹은 본 기억이 있는데 출처가 명확하지 않지만, ‘그녀'가 제기하는 모든 갈등의 시작은 이 허무함 속에 있다. 테오도르는 의뢰인의 편지를 대신 쓰며 존재하는 모든 관계의 한 쪽에 서보는 입장이지만, 발화되는, 그리고 기록되는 말들은 여지없이 테오도르의 본심, 그가 느끼고 감각하는 원초적 감정과 일정 거리 밖에 있다. 이런 경우의 대부분 정작 본인은 속내를 어딘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태어나는 괴리감이 이 영화에서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애초, 그의 감정이란 어떤 말들의 덩어리인지. AI가 대부분을 대체하는 시대에 감정의 역할이란 (어디에) 남아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테오도르에게 정말 ‘사랑'만이 과제(고민)인지. 캐서린과 테오도르의 이별에 대해 영화는 자세히 부연하고 있지 않지만, 그건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테오도르의 몸 어느 구석에 숨어 드러나지 않고있는 감정, 의지를 가진 의사의 부재 탓일 확률이 99.99% 정도로 크다. 스파이크 존스는 어쩌면 AI가 아닌 ‘말'들이 잠식한 감정의 풍경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어찌됐든, 내가 아닌 남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테오도르는 자신의 감정을, 아마 감정을 감각할 세포를 어느 순간 잃어버렸다. 잠을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유독 ‘사랑' 만이 맘을 앓게하고, 온전히 대체되지 못한 채 어딘가 길을 헤매고 있다.
AI와 대필, 구현되는 방식은 물론 질감도 시대 배경도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조건'이지만, ‘그녀'에서 이 두 개의 장치가 구현되는 방식은 왜인지 결코 다르지 않다. 인간의 생활 전반을 대체해버리는 인공지능의 ‘만능 열쇠’ 같은 혁명은 자주 ‘인간미'의 상실같은 말들로 얘기되지만, 대부분의 관계란 일정 정도의 ‘결핍’으로 움직이다. AI가 인간을 대체(소거)하며 인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진다면, 대필은 사람을 치환(의뢰)하며 감정적으로 멀어지는 방식의 구조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미의 상실과 같은 현대 사회 병폐라 지적되는 문제들을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음과 동시에, 여타 다른 AI를 차용한 영화들과 달리 보다 사람,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가장 얄궂은 감정을 데려와 감정의 진위를 자꾸만 의심하게 하지만, 그건 인공지능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오히려 변덕스러운, 결코 코드화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 오묘한 작동 방삭의 탓일 확률이 더 크다. 표정을 잃은 메마른 테오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린 왜인지 더욱 인간다움을 느끼고, AI가 그리는 건 도리어 메마른 감정의, 관계를 상실한 인간의 길잃은 시간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슴 포켓에서 단말기를 꺼내 스위치를 켜고 또 끄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테오도르의 하루를, 난 좀처럼 ‘기계적'이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단 하나의 단어, 아마도 가장 고독하고 외로울 타이틀을 가진 이 영화,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 혹은 성사되지 못한 대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업무의 도우미(를 넘어 주인 능가하는 비서) 역할, 심지어 ‘소리'를 경유한 섹스까지 서슴치 않는 테오도르의 ‘그녀'와 그의 관계는, 사실 비어있는, 미완의, 2인칭이 되지 못한 1인칭의 아슬아슬한, 여지없이 불완전 대화이다. 배터리가 꺼지면 종료되는, 전적으로 말에 의존하는, 애초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도 않고, 언제 어디서든 ‘이별'이 가능한 그저 취약한 외마디. 업데이트를 하느라 단말기가 불통되었던 아침, 테오도르는 어쩔 줄을 몰라 거리를 헤매고 계단에 주저앉아 울먹이는데, 그 절망은 어떤 상실의 표출인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사이에서 속마음을 내뱉지 못하던 그의 매일같던 일상은 어떤 포기의 선택이었는지.
이별은 만남을 떠올리고, 상실은 이별을 그리워하고, 우울은 슬픔을 아파하는 것처럼, AI 세상에서도 감정은 내가 아닌 너의 곁에서 태어난다. 외로움도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애초 2인칭, 둘의 언어였다는 걸 왜 우린 몰랐을까. 그리고 왜 자꾸 잊는걸까. 어떤 2인은 함께이면서도 늘 혼자와 혼자이기도 하고, 어떤 2인은 사람과 기계이면서도 ‘함께'라는 착각을 갖게하고, 어떤 2인은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함께'였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감정으로 설명되는 존재라는 건, 아마 이러한 타인과의 작용/반작용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와 에이미는 옥상에 올라 서로 어깨를 나란히하는데, 그곳엔 두 개의 상실이 있고, 하나의 애틋함이 태어나고, 그렇게 아마, ‘관계'가 자라난다. 그녀는 그곳에 없지만, 10년이 지나 난 어쩌면 가장 맨몸의 ‘사랑'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더난 자리에서 그녀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