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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l 26. 2021

어느 소년 소녀의 여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

다시 시작하는 '우리'를 위한 그 계절, 그 문턱의 '어른들은 몰라요'



시작과 함께 빠져드는 영화가 있다. 대부분 영화의 오프닝이란 현실과 다른 이(異)세계를 선언하는 제스춰의 장면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어느 영화는 유독 ‘그곳에만 존재하는’ 세계를 슬쩍 던지고, 그곳의 시간을 걷는다. 홍상수의 작품들이 제목에서부터 그만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가 바쿠와 료헤이, 아이들의 불꽃 장난으로 ‘자고 있거나 깨어있는’ 상태를 은유하는 것처럼, 영화란 아마 그곳에만 살아가는 이야기의 무한 루프, 여지없이 1인칭에서 시작해 너에게로 확장하는 끊임없는 ‘대화의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몰입하는, 내 이야기처럼 눈물 흘리는, 시간이 흘러도 기억하고 그리고 남아있는. 하지만 그런 ‘시작'에 예고란 없고, 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을 보며, 설마 또 한 번의 ‘그런 순간’을 만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애들이 나오는, 순박하고 깨끗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으니까. 심지어 타이틀은 두 캐릭터의 이름을 따와 ‘보희와 녹양.’ 이만큼 소박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미 마흔을 바라보고, 소년, 소녀의 이야기란 그곳에만 흘러가는, 너와 내가 지나온, 그리고 어쩌면 잊어버린 시절이라는 걸, 난 왜인지 깨닫지 못했다. 영화는 그렇게 그곳에 남아있었다. 



순전히 어감상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순박한 타이틀 ‘보희와 녹양'은 다소 의외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한가운데 한 남자가 등을 보이게 서있고,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한 하강을 시작한다(말 그대로 하반신부터 서서히 수면 아래로 사라지며). 조금 지나면 이 예상 밖 오프닝은 영화 속 영화, 보희와 녹양이 보고있던 스크린 속 장면임이 드러나는데, 그 단촐한 시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또 한 번 다시 새롭다. 감수성 짙은 보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곁에 녹양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보이지 않던 남자는 화면을 가로질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오직 하강하는 남자 만이 존재했던 화면 속 바다만큼 이 장면 또한 설명되지 않은 상징으로 가득한데, 그 시간, 그 장소 영화의 관객은 왜 세 명이었을까. 한 남자는 왜 떠나가고 소녀와 소년은 왜 남아있을까. 그리고 애초 보희와 녹양, 둘은 돼 각자의 이름이 아닌 서로의 곁에서 호명되고 있을까. 하지만 (영화 속) 영화가 끝난 그곳에 별 다를 일은 벌어지지 않고, 오직 보희와 녹양, 초딩 끼리의 대화가 몇 마디 더 오갈 뿐이다.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을 던져놓고도 영화는 두 소년, 소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 십대의 시점으로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마치 보희와 녹양, 그리고 (떠나간) 한 남자로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시작인 것 마냥. 그러니까 보희, 녹양, 그리고 어느 한 명의 남자. 그곳에 그외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영화엔 나이 어린 소녀, 소년이 등장하며 태어나는 시차의 스토리가 있다. 단지 아역이 출연하는 영화들의 스토리 구성상 필요에 의해 소환되는 배역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고, 전적으로 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펼쳐가는, 아이의 시선으로 영화를 끌고갈 때 드러나는 고유의 세계가 있다. ‘보희와 녹양'은 여러모로 키타노 타케시의 ‘키쿠지로의 여름'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키쿠지로가 돈을 벌러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나서는 것과 달리, 혹은 비슷하게 보희는 죽었다고 알려진, 하지만 어쩌면 살아있는 아빠의 자취를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보희는 어떤 이유로 미용실을 운영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고, 어쩌다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단짝 친구가 된 녹양과 대부분의 방과 후 시간을 보내고, 오직 전해들은 엄마의 말로만 존재하는 기억 속 배다른 누나가 다른 곳 어딘가에 보희와 다른 삶을 살고있다. 그렇게 있거나 없거나. 혹은 떠나가거나 채워지거나. 녹양은 보희의 ‘모험'을 함께하고, 혹은 부추기고 둘은 아빠에게 향하는 예상치 않은 서울 언저리의 여름을 걷고, 뛰고 또 걷는다. 사진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도 흐릿한 아빠를 향하는 동력이 무엇일까 싶기도 하지만, 세상 어떤 빈자리는 나를 설명하기 위한 구멍이기도 하다. 보희는 집을 나섰지만, 그건 분명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길, 그곳에 시작도 마지막도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열살 남짓의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이지만, 영화엔 결코 작지 않은 상처의 흔적들이 혼재한다. 보희는 일찌감치 아빠가 집을 나갔고, 녹양은 엄마가, 이복 누나라 생각했던 남희는 사촌 누나에, 남희와 함께 사는 동거남 성욱은 고아이다. 심지어 보희의 아빠는 이성애 가족에 편입될 수 없는, 성정체성의 비밀을 품고있기 까지하다. 그러니까 흔히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형태에 이들은 쉬이 머물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일상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무게를 짊어지고도 영화는 우리가 아는 ‘보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몇 번의 실패와 슬픔, 불안과 공포가 보희와 녹양, 둘의 여정과 늘 함께하지만, 이 두 10대의 소년, 소녀가 보여주는 건 정해진 구성원에 대한 전형적인 미움이거나 원망이 아닌, 내 안의 채워지지 않은 마지막 퍼즐 하나를 기억하려는, ‘존재하게 하려는’ 작고 소박한 애씀에 불과하다. 녹양은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없는 영화를 만든다며 스마트폰을 켜고 촬영을 쉬지 않는데 그렇게 하나의 형태로 남겨놓으려는 어떤 절대적인 것. 소박하지만 필수불가결한 마음과 확신의 물처럼 흐르는 시간들. 우리는 태어나 한 살이 되고 인생을 시작하지만, 정작 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건 어느 시점 부터인지. ‘보희와 녹양'의 떼타지 않은 시선은, 이미 흘러간 그 시작의 계절을 그곳에 데려다 놓는다. 어린 시절 여름이란, 아마,  분명 그런 성장의 문턱이었으니까.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오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극장을 빠져 나가던 남자는 보희의 아빠였고, 그 자리에 남아있던 건 단짝 친구 녹양은 그 부재를 대신하는 존재. 심지어 녹양은 한시한때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이런 우연을 우린,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다소 의뭉스러웠던 오프닝은 시간이 지나, 둘의 여정이 흘러가며, 곧 보희의 다시 시작하는 첫 장면임이 드러나고, 영화의 엔딩, 우린 녹양이 완성한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었음을 영화 속 영화의 엔딩 크레딧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작은 마법같은 연출이 가장 여리고 아름다운 긍정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엔 주어진 시작이 아닌, 찾아가는 시작이 있고, 우리가 잊고있던, 내 안에만 자라나는 계절이 아직 남아, 흘러가고 있다. 영화는 떠나온 자리에서 다시 문을 닫는 액자식 구성의 마치표를 찍고, 사실 세상 모든 모험이란 돌아오기 위한 길이었음을 난 바다 속 소년과 함께 기억했다. 어느 소년, 소녀의 여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 그건 아직 그곳에 있었다. 


https://youtu.be/7VYqcCLIx0s

또 하나의 'boy meets girl', '긴나보이즈'의 '소년소녀'가 얼마 전 발매됐더라고요. 여름이란 새삼, 왜 우릴 설레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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