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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Sep 07. 2021

지속되는 페이드 아웃, 시작하는 밤

어떤 어둠은 종종 밝음 보다 많은 걸 바라본다, 김종관의 밤이 걷는 길



나의 부재와 너의 방문


지금은 좀 힘든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카페에 머물다 떠난 자리에 흐르는 시간이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있(었)던 자리. 혹은 누군가 찾아오기 이전의 시간. 때때로 어느 카페에선 바쁜 사정인지 손님이 떠난 자리에 빈 잔이 오래 놓여있는 걸 볼 때가 있는데 대부분 ‘정리도 안하네'라 혼자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렇게 남아있는 시간이란 지나간 과거일까, 남아있는 현재일까. 김종관 감독의 새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을 보며 그런 별 거 아닌 물음을 꺼내봤다. 내게서 멀어진, 하지만 남아있는. 그런 비어있는 어떤 자욱 같은 것들에 대하여. 어차피 대부분 떠나가고 이미 없지만. 

카페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 앞의 버스를 타거나 타지 못했거나 시간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선 길에서의 이모저모란 애초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내일'이곤 하다. 반대로 잠이 많아 일어나지 못한 새벽녘 집 앞의 하늘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풍경, 그렇게 없던 세계이다. 내가 있던 자리거나 혹은 나만 없는 시간. 이런 걸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비완성형의 시간은 어디에 머물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김종관 감독이 다시 사람을 만나러 떠나는 길의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현실을 참 잊지 못하는 영화다. 한 남자의 꿈에서 시작해 영화는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고, 그곳엔 어쩌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기대 속에 동시에 우려 속에 공개됐던 김종관 감독의 전작 ‘조제'는, 이누도 잇신의 20년 전 영화를 다시 데려온 그 작품은 유독 ‘사라짐'을 바라보는 작품이었다. 그간의 서울 언저리를 거뉠던 그의 영화는 돌연 지방의 후미진 곳들을 배회하기 시작하고, 잊혀지는, 밀려가는, 하지만 남아있는 ‘오래된 세월'이 뽀얗게 먼지를 날린다. 폐허가 되어가는 집도, 인적을 잃은 거리도, 쓸모를 다한 고물 니어카나 매몰차게 버려진 헌책이나 가구 집기들도. 하물며 오늘을 살아가는 왜인지 어제의 사람들까지. 김종관 감독은 원작 속 20대 초반의 설정을 30을 넘은 여자 주인공으로 치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누도 잇신의 열병처럼 끝이났던 성장 무렵의 그 사랑은 나이를 먹고 빛바랜 세월속에, 그렇게 그곳에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달팽이 미끄러지듯' 사라진다는 것. 그런 세월의 흔적, 그리고 ‘남아있음'이란, 혹시 현실이 현실을 벗어나는 순간이 아닐까. 그건 분명 현실은 아니지만 ‘다하지 못한 오늘’일지 모르고, 이별이거나 죽음, 그리고 상실의 ‘이후.' 김종관 감독은 왜인지 지금 그 못다한 길을 다시 걸으려 한다. 


이제야, 밤이 시작된다



남자는 꿈을 꿨다. 그는 늙어있었고 곁에는 한 명의 늙은 여자가 함께였다. 남자는 왜인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건 모두 꿈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다. 사실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아무도 없는 곳'은 이렇게 한 남자의 꿈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말 되어지는 지난 밤의 꿈’을 데려와 문을 연다. 그다지 새로운 방식의 오프닝은 아닐 수 있지만 분명 범상치 않은 시작이고, 김종관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돌아볼 때, 그건 하나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나는 이걸 <페르소나> 속 ‘밤을 걷다'의 엔딩 이후, '최악의 하루'에서 한예리가 춤을 추던 그 아름답던 밤의 너머, ‘더 테이블'이 매번 발걸음을 돌리던, 찻잔 만이 남아있던 테이블의 ‘다음'으로 보았는데, 그건 곧 김종관의 영화가 가지 않았던 길, 그 첫 걸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일상의 조각을 쌓고쌓고, 한걸음 한걸음을 더하고 그렇게 차이와 반복을 오가던 길에 시공간을 초월한 빛이 잠시 내리비칠 때, 김종관의 영화가 있(었)다. 늘 멈춰섰던, 더 나아가지 못했던, 혹은 그러지 않았던. 그렇게 아무도 없던 곳. 런던에 머물다 서울로 돌아온 창석.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곳은 곧 떠나온 자리이고, 그런 길에 마지막이란 결국 ‘사라짐'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아이유가 분한 미영과 윤혜리가 연기한 유진, 사진을 찍는 성하로 나타난 김상호와 바에서 일하는 주은 역의 이주영. 그리고 수화기 너머 어딘가의 누군가. 모두 네 명의 인물과 차례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무도 없는 곳'은 여러모로 옴니버스 형태로 제작된 전작 ‘더 테이블'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있다. 비슷한 분량의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진 탓에 더욱더 유사하다는 비교도 가능하다. 다만 ‘더 테이블'이 만남을 더해가며 이야기를 펼쳤던 것에 반해, ‘아무도 없는 곳'은 떠나감, 헤어짐의 이후, 비어진 자리, ‘부재'를 밟아가는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창석이라는 이야기를 끌고가는 ‘진행자(이자 관찰자)'가 존재한다. 그만큼 하나의 이야기는 그 다음 이야기와 혹은 그 다음의 이야기는 이전의 이야기와 어떻게든 상호 작용 하에 있다. 말하자면 나열에 의한 병렬의 구조가 아닌 창석의 의식, 혹은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비선형적 서사 속에 영화는 유영한다. 



창석이 왜 미영과 마주앉아 있고, 성하를 만나는 우연은 왜 찾아오고, 유진과의 만남은 왜 두 개의 죽음을 품고 있는지 이들 사이에 개연성은 느껴지지 않지만(사는 것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의 꿈이 미처 그 흔적을 감추지 못한 자리, 그곳에 상실, 죽음, 헤어짐 이후 ‘어둠'과 마주하는 날들이 왜인지 자꾸 벌어진다. 그렇게 영화적 개연성을 확보한다. 영화엔 만남과 헤어짐, 아니면 이별 이후, 상실이거나 죽음의 모티브가 여러번 스쳐가는데 그건 모두 ‘지나온 난 뒤의 자욱’이고, 마지막이 스쳐간 뒤 쌓여있는, 그리고 남아있는 세월이 보이지 않는(던) 이야기를 드러낸다. 미영과의 만남 이후 창석이 유독 ‘듣는 자’리에 있다는 건 그저 우연일까. 김종관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대화 보다는 ‘듣다'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말했는데, 그건 곧 ‘(바라)보다'의 행위이기도 하다. 

꿈이거나 잠에 든 도시의 이야기거나 어둠 속이거나 기억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 내일 속에 밀려갔던, 그렇게 잊혀졌던 세상 모든 ‘진행형'들의 플래쉬백. 시간이 멈춘 듯한 지하 카페. 그곳의 시간은 유독 느리고 창 하나 사이로 세상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달팽이가 남기고간 점액질의 흔적이, 어둠 속을 아른거린다.


자꾸만 맴도는 인트로



남자의 꿈으로 시작한 영화는 미영과 마주한 자리에서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보다 타이틀이 등장하기도 전에 시작하는 이 챕터의 이야기는 굉장히 묘한 감각의 체험을 전하고 떠나간다. 남자의 꿈(의 낭독)이 끝이 난 뒤 카메라가 비춘 곳엔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잠을 자고, 맞은 편의 남자는 책을 읽는 중이다. 어떤 관계이고 어떤 설정인지 오로지 둘 사이의 막연한 대화 만으로 끌고가는 이 대목은 그야말로 오직 감각 만이 존재하는 물성이 휘발된 시간의 재현이기도 한데, 시제가 엉키고 화자와 청자의 경계가 힘을 잃고 미영의 대사 ‘누군데 누구를(이지은의 발성으로 매우 마법처럼 들린다)’처럼 무엇 하나 단정할 수 없이 진짜같은 가짜와 가짜같은 진짜를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떨구어 놓는다. 

서울 어느 지하도의 카페,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되고 낡은 가구와 분위기. 창밖의 걸음을 서두르는 시간과 달리, 종이 신문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는 바스락 소리, 찻잔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고요하게 울리는 공간에, 시제를 잃은, 어쩌면 가짜이거나 진짜인 이야기가 머물고 잊혀진다. 오늘이거나 어제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어쩌면 이것이 ‘아무도 없는 곳'의 재연일까. 영화는 그제야 타이틀을 꺼내놓고, 늙은 남자와 여자, 오래된 호텔과 나이 먹은 노숙자. 그리고 유일하게 모든 걸 기억하는 벨보이 할아버지. 오직 오래된 것들 만이 그곳에 기억된다.



미영과 유진, 성하와 주은을 연이어 만나는 '아무도 없는 곳'은 단순히 네 번의 만남으로 구성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영과 그 후, 꿈의 여운이 머물던 카페의 오후와 그 나머지를 영화는 엄연히 분리하고 있다. 타이틀의 등장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유일하게 (아마도 가장 묘한 형태의) 1인 2역을 연기하는(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지만) 이지은과의 장면은 현재와 과거, 꿈과 현실, 기억과 사실, 진짜와 지어낸 말, 나의 기억과 너의 시간이 묘하게 뒤섞이며 ‘아무도 없는 곳’, 그곳에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김종관 감독은 지하도 오래된 카페를 거의 손보지 않고 그대로 촬영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바쁘게 걷는 사람들 곁에 유독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우리가 두고 온 어제, 그곳에 남겨진 오늘, 내가 저버리거나 너가 뒤로한 그 날의 잔상을 이곳에 데려다 놓는다. 마치 창석이 꿈 속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고보면 이 영화는 꿈과 현실, 어제와 오늘, 기억과 망각, 그런 ‘시차’에서 출발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영화는 언제나 시차의 예술, 타이틀이 등장하기도 전 시작하는 미영과의 에피소드는, 엄밀히 말해 이 이야기 틀 안에 머물 수 없는 시제, 그런 현실, 그런 픽션이다. 작품의 도입이라기 보다는, 잠에서 덜 깬 새벽녘, 혹은 그날 밤(꿈)의 에필로그 같은. 어둠을 보기위해 잠을 미뤄야 하는 것처럼, 꿈을 꾸기 위해 잠에 들어야 하는 것처럼, 김종관의 영화는 지금 지나온 것들을 바라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는다. 그렇게 마지막에서 시작을 바라본다. 그리고 난 이게 김종관의 영화가 늘 (돌아)가려 했던 산책의 목적지, 바로 그곳이라 생각했다. 


지속하는 종말, 여름이 떠나갔다



여름이 끝났다. 어쩌면 끝이 났다. 우리 집 아파트엔 유독 나무가 많고 새가 많이 지저귀고 벌레도 무성한데 매미 울음이 잦아졌다 느꼈던 아침, 웬 고동 나무 한 그루에 매미 모양의 껍질이 붙어있었다. 오직 6일을 살기 위해 100년의 세월을 땅속에서 보낸다는 매미인데, 그 애달픈 여름 한철이 그로테스크한 껍데기로 그곳에 있었다. 좀처럼 계속 보고 있을 수 없는 디자인이라 금새 눈을 돌렸지만, 아마도 계속, 그렇게 있었다. 여름 끝무렵의 별 거 아닌 에피소드. 하지만 세월은 어쩌면 그렇게 잊혀지는 걸까. 기후 변화가 요상하다는 요즘, 그건 분명 ‘흘러간다'보다 ‘잊혀진다'로 변태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창석이 서울에 돌아와 미영을 만나고 성하와 마주하고 바에서 묘한 술을 마셨던 건 겨울의 마지막, 봄이 오려는 문턱이었을까. 그런 ‘사이'의 시절이었을까. 


김종관 감독의 어느 꿈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그렇게 모든 사라짐 이후의 시간을 추적하고 있는 영화다. 그의 섬세한 산책으로, 면밀한 안테나와 감수성의 무기로 우리가 잊고있던, 세상이 놓쳐버린 날들을 차곡차곡 되짚고 되뇌인다. 그렇게 드러낸다. 깊은 어둠 속을 걷다보면 점점 시야가 열리는 것과도 같은 체험이, 이 영화를 계속 걷게한다. 창석의 2년 만이라는 부재의 시간, 너가 떠나간 뒤 내게 남아있던 어제가 아닌 오늘까지의 날들, 우연이 아니었으면 잊혀졌을 성하와의 과거와 같이 보이지 않던 시간이, 빛나는 어둠 속에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별, 죽음, 상실 이후의 어김없이 흘러갔던 날들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없지만 너는 나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그렇게 전이되는 나와의 시간(기억)이 나만 없는 그곳에 반복된다. 마치 종말을 반복하는 묘한 뫼비우스의 시간처럼. 우린 그저 또 한 번의 만남이 필요했던 걸까. 어쩌면 난 그제야 김종관의 산책, 그 만남들의 '사정'을 알아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건



마지막으로, 김종관 감독은 바에 들린 창석과 주은의 장면에서 시를 하나 써내는데, 난 어김없이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 ‘조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춘'은 동물원에서 오기로 약속한 연인은 도착하지 않고 오직 기다리던 시간만이 존재했다 사라지는 이른 봄날, 그야말로 '비어있는' 이야기다. 그와 비슷하게, 그리고 다르게 바에서 창석은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리지 않고, ‘기다림' 만이 존재하는 시간이 그곳에 살며시 다가와 빈자리를 채운다. 주은의 시구절을 빌려 '기다린다는 말로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린 남자.'  바 카운터 자리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이렇게 '오지않음'을 은유하는 자리였을까.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았지만 테이블엔 줄어든 술병과 세 번의 비워진 잔이 남아있고, 그렇게 '부재'의 시간이 태어난다. 주은은 남의 기억(어제)으로 시를 쓰는, 오늘을 사는 여자. 사랑도 삶도 관계도 언젠가 끝이 나지만 그건 곧 타인의 시작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엔 늘 시작과 마지막의 ‘종말'이 숨어있다. 새로운 시작으로 대체되는 무한 루프의 종말들. 버스 정류장을 향하던 길 난 오지 않는 너를 생각했고, 집으로 걸어가던 아침 머릿속엔 올 여름을 울렸던 매미 소리가 맴돌았다. 그렇게 우린 너와 나의 절반 만 살고있는 걸까. 어느 어둠의 문턱에서 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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