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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27. 2021

천사라 쓰고...'텐시'라 읽는다

기적이 된 오해의 로드무비,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이상한 '합작 영화'의 탄생


두 나라의 돈과 인력이 더해진 ‘합작 영화'를 나라간 교류, 국적을 넘어 만들어낸 영화 제작의 지칭이라 한다면, 대부분 완성되는 건 별 다른 화학 작용 없는, 명칭상・형식적 협업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주목받는 신진 감독이 해외 투자를 받아, 해외 유명 배우와 국내 거장 감독이 손을 잡고 벌어지는, 좀 심하게 말하면 겉만 소란스러운 이슈작이거나 재정상의 이유로 덧붙여진 수식. 국적이란 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는걸까 느끼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얼마나 많은 영화가 정해진 프레임, 반복된 현장 환경 안에서 안주하고 또 태만해왔는지...다소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국적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다름에도 또 한 편의 (다소 어색한) 자국 영화가 태어나고 마는 사실. 난 어쩌면 이런 게 결국 ‘합작 영화'의 '현실적 정의'는 아닐까 생각해버릴 때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프랑스에서 찍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시간이 흘러 중국에서 태어난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잘못 번역된 영화처럼, 좀처럼 영화적이지 않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프랑스 상류층 가정에 잘못 삽입된 일본 가족의 전형적 갈등 같, 거리에 역전당한 시간의 애수, 철 지난 가을의 스토리처럼 어디에도 수렴되지 않는 이질감. 그러니까 물리적 의미의 ‘합작’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융화의 영화는 정녕 불가능할까라는 질문. 말을 주 매개체로 사용하는 유성 영화에서, 그 차이의 나열은 그 만으 서사의 레이어를 만들어 낼 텐데, 좀처럼 그렇지 못하는 오랜 찜찜함과 의구심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20016년 트럼프 정권 이후 세계가 분열을 가속화하기 시작한 가운데, 전후 최악을 맞은 한일 양국 그 어디에서 이시이 유야 감독은 자신의 첫번째 한일 '합작 영화'를 었다. 제목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하지만 원제는 ‘아시아의 천사(アジアの天使).’ 결론부터 말하면 근래 내가 본 가장 이상한, 그리고 당혹스러운, 하지만 어쩌면 가장 그럴듯한 '합작의 영화'가 탄생했다.



불확실함의 128분, 영화와 현실 그 '사이'


이 영화는 우선 이상하다. 한일 합작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일본인 스태프 몇몇이 참여한 한국 영화에 가깝다.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이 제작을 맡았고, 스태프의 90% 이상은 한국인, 그리고 촬영 역시 100% 한국 올 로케이션이다. 그래서, 그렇게 화면을 채우는 건 온통 서울의 시장통이거나 고층 빌딩과 전신주가 가득한 강남 대로, 또는 허르스름한 주택가의 지저분한 골목길이거나 쉴 줄 모르고 울려대는 차들의 빵빵빵 클락션 소리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일본에선 이번 이시이 영화를 일본 감독과 배우가 한국에서 촬영한 한국 영화라고 소개를 하기도 하는데, 전에 없던 포지션, 너와 나의 '사이'가 아닌 너에게로 향하는 그 방향의 이야기가 그래서 이상하고, 기존 ‘합작 영화'와 다른 지점에서 생경하다. 영화의 예고편을 처음 보고 난, 잘못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같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는 언어의 장벽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설정의 형, 오다기리 죠가 분한 남자 토오루는 몇 마디 어눌한 한국어 대사를 소화하지만, 두 시간이 넘는 영화 분량을 생각하면 극히 적은 몇 마디에 불과하다. 츠요시(이케마츠 소스케)와 그의 형은 일본어로, 솔(최서희)과 봄(김예은), 그리고 둘의 오빠(김민재)는 한국어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언어로 이해한다. 다르고 또 같게. 같고 또 다르게.

하지만 이건 사실 리얼리티를 상실한 매우 이상한 문장이기도 한데, 대화의 성립이란 관계의 농도에 비례하고 이들은 그저 같은 기차를 탄 사이일 뿐이다. 알고 보니 기차는 왜인지 같은 행선지 강릉을 향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불완전한 채로 완전하다. 영화가 촬영된 건 2020년 1월에서 2월 즈음, 한국에서 불매 운동이 극에 달하고 양국간 감정이 유독 날서있던 때이고, 이시이 감독은 완성된 영화는 기존 스토리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말하며 “영화는 불확실한 것"이라 유독 강조하기도 했다.


이케마츠 소스케가 일본 개봉에 맞춰 공개한 한국 촬영 기간 동안의 두 컷. 김민재 배우와 이케마츠 / 이시이 감독, 박정범 감독(프로듀서), 그리고 이케마츠 쿤.


“영화는 약간의 실수나 사건으로 모두의 마음이 멀어지게 되고, 매우 깨지기 쉬워요. 그래서 다루기가 정말 어렵다 느끼지만 여러번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는 게 있고, 저에겐 늘 그에 대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한국 여배우가 악화된 한일 관계를 이유로 하차하면서 한 번,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촬영이 중단 돼 또 한 번, 소위 엎어질 위기를 넘어왔다. 그래서일까. 이시이 감독의 이번 영화엔 유독 그답지 않게 말이 많고, 그것도 너무 직접적이고, 설마 이런 말까지 하는 걸까 싶은 당혹스러운 상황도 연출된다. 특히나 중반 이후 난 ‘고추장이 잘못 묻은 거 아니야'라 느낄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는데,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진심이란 늘 초라하고 촌스럽고, 오글거릴 만큼의 스트레이트, 직설 화법을 하고있었다.


어느 불화의 동행, 너와의 강릉행


영화는 단촐히 정리해 일본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시작하는 로드 무비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츠요시는 일본에서의 과거를 딛고 아들과 함께 새출발을 위해 서울로 향했고, 솔, 봄 자매가 오빠와 함께 강릉행을 택한 건 부모님 제사(라 이야기하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함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정에서 서로 다른 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 개의 이야기는 몇 번의 스침, 어긋남을 거쳐 이내 ‘함께’에 이르, 츠요시와 그의 아들과 형, 솔과 봄과 그리고 둘의 오빠. 이렇게 셋셋 합을 맞춘 일본, 그리고 한국의 서사 어느새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택시 안의 라디오, 사무실 TV에서 한일 관계 악화를 이야기하는 시절에, 한국, 일본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남녀왜인지 함께 여행을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다소 작의적 느낌마저 드는 현실 개입은 또 무까 싶기도 한데 2016년에 시작해 2020년 겨울 크랭크업까지. 다시 말해 영화는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로 걷던 시절을, 그야말로 관통해온 ‘시대의 이야기’이다. 이시이 유야 감독은는 이번 영화에서 분명, 불확실함의 영화가 아닌, 불확실하게 흘러가는 현실을 택했다.



동업을 하던 파트너에게 뒤통수를 맞고 (유일한 희망이라 믿는) 미역을 찾아 떠나는 츠요시 일행과, 깨져버린 꿈을 추스리지 못한 채 무작정 엄마 품으로 향하는 솔과 봄 남매들. 조금 바꿔 이야기해보면 과거를 잊지 못하는 남자(츠요시)와 미래를 믿지 않는 여자(솔). 솔의 오빠 정우는 첫 만남에서 역사 문제를 이야기하고 일본 사람을 일본놈이라 이야기하는, 당시 국민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솔과 츠요시, 그리고 아픔과 상처에서 시작한 그들의 여행을 단순히 사회적 분위기의 치환이라 말하기엔 다소 수긍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미안한 마음이 인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 아무런 동기도 없는 둘 사이의 동행 또한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흘러가지만, 이들이 밟아온 아픔의 역사가 자꾸만 서로를 향하려 한다. 가령 무명 가수로 일하는 솔이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른 뒤 눈물과 함께 소주를 한 잔 들이킬 때, 그곳을 지나던 츠요시가 건네는 말 한마디. ‘알아요. 슬픈 일 투성이지요.’ 솔과 츠요시가 처음 마주한 장면, 그런 시작. 그렇게 시작같지 않은 시작.



일본말이라, 한국말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발화되는, 그럴 수 있는 마음...아니 감정 같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오해에 담긴 진심같은 것들의 스토리. 솔은 실패한 아이돌 출신 가수에 부모를 잃고 오빠, 동생 셋이 살아가는 힘겨운 가장이고, 츠요시는 유일하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던 아내를 젊은 나이에 잃고 아들 마나부와 단 둘이 되어버린 아빠다. 국적은 달라도, 아픔은 아픔을... 알아본다.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이지만 난 이시이 감독의 전작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 속 신지와 미카 사이의 ‘애달픈 마음’을 이 영화에서 다시 보고 말았다. 신지,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츠요시를 연기한 이케마츠 소스케는 한 인터뷰를 통해 영화는 처음 받은 시나리오와 상당히 달라졌다며 “처음엔 로드 무비가 아니었어요. 남아있는 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 핵심 뿐이에요"라 이야기했는데 그건 곧 불완전한 소통의 결말. 이해가 아닌 오해,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태어난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이해가 아닌, 믿음을 걷는 길



영화는 이시이 감독이 일본어로 쓴 각본을 박정범 프로듀서가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경유했다. 그만큼 ‘완전한 이해’를 포기한, 서로가 다름으로 가능한, 그렇게 남아있는 것들의 결정이기도 하다. 실로 이시이 감독은 이런 로사항에 대해 말하기도 했는데, 그건 영화가 가진 본질적 물음, 동시에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태생적 ‘오해'(어쩌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엔 언어란 벽이 있었고 언어적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6할 밖에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영화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믿었고, 그에 대한 서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에서 시작된 이시이 감독의 ‘말'에 대한 3부작, 그 두 번째 작품 이기도 하다(나머지 한 편은 이후 일본에 돌아가 제작한 'Madder Red'이다). 말을 믿을 수 없는 언어 파탄 사회를 살아가는 남녀의 밤에서, 말이 기능을 상실한 시대에서 숨겨진 진심을 찾아가는 로드무비. 그런 전환의 두 번째 발걸음. 일본을 떠나, 서울을 출발해 어떤 이상한 영화는 지금 말의 진심을 줍기 시작했다.



제목이 바뀌어, ‘아시아의 천사'에서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으로 수정되며 아마 더 놀랄지 모르겠지만, 이시이 감독의 이 영화엔 정말! 천사가 등장한다. 은유나 상징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천사가 츠요시와 솔, 그리고 토오루 곁에 스치고 떠나간다.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처럼 별 일도 아니라는 듯 하얀 날개를 달고 말 그대로 천사의 형상으로 절망에 빠진 솔의 곁에, 어릴 적 지워지지 않은, 어깨에 남은 기억(상처)로 영화와 함께 128분의 시간을 함께 산다. 결국 영화는 실패의 벼랑 끝, 회복되지 못한 상처의 막다른 길목의 세 남녀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이시이 감독이 그리는 그 상처 입은 서사엔 잠재된 ‘천사의 재'이 내포되어 있다. 영화의 초반, 정체에 묶인 택시 안에서 기사는 승객은 아랑곳 없이 도리어 성질을 부리고, 츠요시 부자는 끝내 목적지까지 도착도 못한 채 하차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츠요시가 아들 마나부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상호 이해가 가장 중요.’



이 장면에서 난 처음으로 약간의 위화감과 함께 장난처럼 ‘이케마츠가 천사?’라고 혼자 속삭였는데, 실제 영화는 빔 벤더스의 천사가 그랬던 것처럼, 절망 곁에 모습을 드러내는 천사, 희망의 상징이 만약 그것이라면 그 존재의 현존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츠요시와 토오루는 어린 시절 천사에게 물린! 경험이 있고, 그건 아직 상처로 남아있고, 그렇게 둘은 절망 속에 있지만 그건 곧 희망 바로 곁, 바로 문턱 앞이기도 하다. 하나 건너 교회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의 골목길에서 이시이 감독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까...본래 이 영화는 한 명(?)의 천사가 아닌 다수의 천사가 등장하는 설정이었고 사실 이시이 영화에서 천사는 그리 생소한 오브제도 아니다. 또 한 명의 일본인 배우, 천사를 연기한 세리자와 타테토는 이시이 감독의 2010년작 ‘사치코와 못생긴 천사들’에서, 그리고 오다기리 죠가 연출한 2015년 작품 ‘이상한 집'에서 천사 역할로 이미 몇 번 등장한 바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하얀 날개를 단 중년 남성의 아시안 국적 천사.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들은 어느 하나 아픔을 피해가지 않았고, 그건 항상 내재된 희망, ‘상호 이해'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이시이의 영화는 늘 이상하게 한 걸음 성장한 듯한 묘한 희망을 안겨다. 그리고 이번엔 아무런 수식도 없이 ‘아시아의 천사.’그는 정말 절망에 빠진 한일 양국에 평화를 기원하고 싶었던 걸까. 이케마츠 소스케는 “이 영화에는 어느 상징으로서 백인도, 흑인도 아닌, 서양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시아의 천사가 필요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역대 최악의 관계에 빠져버린 한일 양국 사이에 등장하는 다른 어디도 아닌‘아시아의 천사.’ 이렇게 노골적인 진심에 난 속내를 감춘 내 안의 장벽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알 수 없지만 알 것 같은 것, 사랑..이 아닌 그에 가까운



본래 로드 무비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어서인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의 여행은 다소 정당성이 없다. 츠요시와 토오루의 강릉행이란, 미역이라는 실은 존재도 하지 않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반쯤 장난같은 말이 시작이었고, 그 조차 전혀 모르던 솔 봄 일행과 함께 할 정도로, 루트는 아무런 주저 없이 방향을 튼다. 솔과 봄의 여행 역시 부모님 제사란 명목으로 간신히 유지될 뿐 애초 서로 함께 여행을 떠날 만큼의 사이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묘지 앞에서 솔은 “미안한데 왜 오려고 했는지 기억이 안나"라 이야기한다. 오히려 영화는 로드 무비의 전형적 서사 구조를 가져와 츠요시 무리와 솔 봄 남매, 촌스럽지만 달리 말해 일본과 한국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애를 쓰려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여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좋지 않던 사이가 호전되곤 하는 여행길의 이상한 매직, 진부하고 전형적인 기적의 스토리처럼.



먼저 둘 다 3명과 3명. 츠요시의 아내가 세상을 뜬 건 위암 때문이었고, 솔, 봄의 엄마 역시 오래 전 위암으로 투병하다 숨졌다. 그에 더해 엄마 없는 10살 배기 마나부는 솔의 오빠 정연과 오버랩되고, 엄마를 닮아 위가 좋지 않은 솔이 마나부 곁에 설 때면 어릴 적 상실이 매어지는 듯한, 촌스럽고 뭉클한 뉘앙스가 연출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자꾸만 둘 사이의 공통점을 보려한다. 상처를 품은 가족, 희망을 잃은 땅, 천사를 본 적이 있는 츠요시-토오루와 솔. 그리고 다소 한국 드라마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후반부 상투적 전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진심이, 별 다른 장식 없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시이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달라 당혹스럽고 김치 맛이 너무 쎄 투박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마지막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선...이 대사가 대체 어떻게, 어떤 번역, 경유지를 거쳐 만들어졌는지 의아할 정도록 어색함이 어색하다. 다만, 솔이 내뱉는, 울부짓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날것의 진심을 영화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정확히 내가 ‘잘못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같다 느꼈던 그 지점이, 그냥 그렇게 긍정된다.



하지만 동시에  왜 그 촌스러움, 어색함을 피하고 싶었던 걸까. 전작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을 가져왔던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처럼 좀 더 감각으로, 말이 아닌 뉘앙스로, 보다 세련된 거짓말로 그려진 이야기를 찾고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왜 ‘아시아의 천사'가 아닌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를 보려 했던걸까. 어쩌면 그저 난 그렇게 그냥 솔직하지 못했던 게 아닐. 가장 의뭉스럽고 의아했던 영화의 라스트 부분. 솔이 다시 마주한 천사 앞에 내뱉는 질문을 가장한 본심처럼, 내 곁에 천사, 기적같지 않은 기적을 난 그저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꿈꾸던 가수의 길은 진흞탕에, 좌절 끝에 빛은 보이지 않는데, 그럼에도 ‘그냥 이렇게 살고 있어도 괜찮은 거죠?’라는 솔의 말을, 난 그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 뿐인지 모른다. 천사도, 기적도 보지 못한 수 백 년의 역사이지만, 아름다운 기적 만이 기적이 아니고, 살아온 아픈만큼 상처입은 천사는 분명 지금도 나와 너의 곁을 맴돌고 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기적



덩달아 솔직해지는 탓에 곤혹스럽기 그지없지만, 이시이 감독의 이 영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직설적이고, 가장 정직하게 고백하고, 가장 숨김없이 드러낸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가 갖게되는 용기, 자신감의 표현인 것 마냥 그는 여느 때보다 그렇게 자유롭다. 그러니까 솔과 츠요시가 마주한 마지막 바닷가에서, 영화의 초반 엄마를 잃던 날의 파도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그곳에서 솔의 한국어는 너무나 한국어이고, 츠요시의 일본말은 어김없이 일본말이지만, 그렇게 완전한 이해가 실패하는 그곳에 우리는 하나의 최선을 본다. 천사가 또 한 번 다녀간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오늘을 긍정하려 한다. 아니, 하고싶다.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그에 매우 가까운, 사랑이 될 가능성이 있는 마음, 그런 최선. 어차피 이해도 못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음. "기적엔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인생의 가능성, 그런 비약의 순간이 있습니다." 이케마츠 소스케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화가 현실에 대한 거짓말이라면, 그 거짓말, 영화가 현실을 비약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 그건 유치하기 그지없는 진심, 기적, 그리고 천사였을까. 이시이 감독은 이번 영화를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했다’고 이야기했고, 그런 탓(덕)에 ‘지금까지의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고도 했다. “실은 쓸모없는 고집을 모두 덜어낸 기분이에요. 뭐든 버려도 상관없다. 뭐든 보여줘도 괜찮다.(웃음) 그런 의미에서 매우 파렴치한 영화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여정, 너에게서 나를 찾는 발견. 그런 실패와 오해. 난 이제야 그가 말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원점회귀의 말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아마 이해에 가까운 오해이겠지. 나는 나를 보지 못해 너는 너를 알 수 없어 서로를 미워하고 다시 바라보고 그리고 돌아서고. 하지만 그곳에 기적이 있다면 아마도 너와 내가 같은 밥상에서 한끼를 나누는 시간, 그곳에 천사가 내려오는 순간일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https://youtu.be/-ABUE--ICBg

매우 아픈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묘하게 당찬 다짐이 남아요. 노래는 '써니데이 써비스'의 I'm 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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