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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10. 2021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오늘',
그건 은총이었다

 어쩌면 홍상수의 코로나 1일, '당신의 얼굴 앞에서'




*참고로 이 영화는 기독교적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용한 대사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충망 너머 네모난 풍경. 어쩌면 비가 왔었나. 아파트 빌딩에 둘러싸인 단지 내 공원(인공 자연). 아파트가 대변하는 의식주와 주변에 자리잡은 너와 그들의 하루.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을 바라보는 ‘어느 높은 곳의 당신.' 화면은 마치 16mm 필름으로 찍은 듯 색이 바래있고, 한참의 정적 후 카메라는 상승을 시작, 아마도 가장 익숙할 도심의 ‘아파트 뷰'가 등장한다. 콘크리트 벽의 102동과 103동. 그렇게 지상의 삶이 소거된 높은 곳에서의 일상. 이는 곧 영화 속 정옥이 거주하는 아파트 창밖의 전경이고, 동시에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심 라이프의 '일상적 뷰'에 다름없다. 홍상수 감독의 27번째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를 코로나 이후 그가 찾은 ‘삶'의 궤적이라 한다면 지나친 오독일까. 몇 번의 흑백 영화를 지나 다시 색을 지니게 된 그의 영화를 ‘돌아옴'의 신호라 본다면 과장일까. 여기서 홍상수는 전과 달리 수평이 아닌 수직의 패닝을 하고, 난 그 순간, 제자리에서 비약하는 오늘, 그런 낯선 기시감을 느꼈다. 홍상수(의 세계)는 지금, 어쩌면, 코로나 이후를 시작하려 한다. 

https://youtu.be/HZ_VuI3cwGI


홍상수 영화의, 어쩌면 코로나 '그 후'


작고 아름다운,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그곳에 어제가 개입할 틈은 자리하지 않고 미래가 스며들 새 없이 모든 건 완전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는 오직 단 하루, 24시간의 이야기이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긁적이던 상옥(이혜영)의 모습에서 시작, 아파트 ‘앞에서의’ 전경을 한참 바라본 뒤 다시 상옥에게 돌아오는 영화는, 미국에서 귀국해 동생 정옥(조윤희)과 함께 이틀 밤을 보내고, 이태원과 인사동, 택시 안과 길가를 맴도는 단 하루의 세월 만을 담고있다. 이전의 칸 해변(‘클레어의 카메라)’이랄지, 강원도의 어느 강가(‘강변 호텔'), 베를린과 서울 그리고 다시 강원도 까지 이어졌던 ‘인트로덕션'의 행적을 떠올리면, 극도로 미니멀, ‘떠남'을 경유하지 않는 제자리의 시간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돌아옴'의 시간에 서있다.

다만, 이번 영화는 제목 ‘당신의 얼굴 앞에서'에서 느껴지듯 미묘한, 보이지 않는 자리, ‘떠남'에서 찾을 수 없던 ‘실체’, ‘거리'로 환산되지 않는 ‘오늘’이거나 지금이란 광대한 시제 안에 내재된 이터너티, ‘영속의 세계’를 품고있고, 그렇게 서성이는 ‘산책’, 그 길이기도 하다. 상옥은 지금 막 미국에서 갓 돌아온 상태, 그리고 산책이란 비시간적 물성으로서의 일상. 영화는 초반, 상옥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아마) 그녀가 노트에 적어놓았던 글귀를 들려주는데, 여느 아파트에서의 늦은 아침이 그곳에 ‘오늘'이란 시간으로 그렇게 기록된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이 진실, 얼굴 앞에 보이는 것이 은총입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새 30년 세월. 하지만 세상은 실은 24시간, 오늘 하루로 완전할지 모른다. 



미국에서 돌아와 단 하루의 시간을 걸어가는 영화이지만, 상옥의 이야기엔 오래 전 과거,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가 숨어있다. 한 때 배우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갔던 일, 그리고 그건 동생 정옥과 가족에게 ‘버려짐'의 기억이었다는 사실, 그렇게 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심지어 상옥의 미국 생활을 정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현실까지. 영화엔 말 되어지지 않는 과거가 발에 치인다. 그러니까 좀 불친절하다. 심지어 이야기가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기까지 영화는 정옥과 상옥, 둘의 관계를 말해주지 않고, 오로지 지금, 그곳에 남아있는 오늘의 기억만이 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한다. 상옥의 ‘지난 역사'가 드러나는 것 역시 정옥과의 이른 브런치 대화 중이거나, 지나던 행인의 수상한 기억력 탓일 뿐, 영화는 굳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리해 플래쉬백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을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오늘'의 끝에서'


상옥과 정옥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장면, (관객의) ‘얼굴 앞으로’ 강가 자연을 배경으로 두 번의 행인이 멀리서 다가와 다시 지나간다. 한 번은 남녀 커플이, 그리고 또 한 번은 중년 남성이. 사실 이 대목은 매우 이상한데, 두 번의 오고감을 우리는 보았고 그들(상옥과 정옥)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보지 못함과 봄’, ‘다가오고 지나감’이, 새로운 컷의 개입 없이 하나의 신‘안’에서 이뤄진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이전 영화와 달리 대화 중에도 인물을 향해 줌업을 하는 일이 없고 스크린 크기 만한 풍경, 그것이 ‘오늘’이라면 그 안에 다가오는 것을 모두 보이게 한다. 모두 다 받아들인다. 

난 그 순간 영화가 돌연 시간성을 확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를 코로나 시절 잃어버린 시간 감각, ‘오늘’에 대한 홍상수식 해석이라 애기한다면, 지나친 코로나 피해 망상일까. 하지만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바라보는 것, 오래 보는 것, 그러니까 ‘클레어의 카메라.' 그곳엔 분명 우리가 보지 못한 오늘, 그 흔한 오늘의 ‘오늘’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초반 정옥은 매일을 보면서도 왜, 상옥에게 ‘오랜만'이라 인사를 했다. 



근래 들어, 최근 홍상수 영화에선 전과 달리 생소하게 느껴지는 ‘현실 개입'이 있다. 그의 영화는 늘, 가장 멀리,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 느껴지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변화가 있다면 그건 가장 가까운 일상과 엮이고 관계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가령 ‘도망친 여자'에서 한참을 언쟁했던 길고양이 문제랄지, 암탉으로 불을 지핀 성차별 이슈, 그리고 두 번이나 등장하던 ‘집'을 둘러싼 대화와 심지어 금액까지 튀어나와버린 4억이란 숫자. 홍상수 영화를 논하며 이와 같은 뉴스 1면에서나 볼 법한 이슈를 꺼내는 건 여전히 주저되는 일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느껴지는 보다 큰 변화의 조짐은 생, 죽음 보다 삶, 비관으로 회피하고 눈을 감던 ‘실체없는 실체’ 앞의 돌아섬이 아닌, 길가의 풀잎을 (오래) 바라보고 순간을 다짐으로 버티고, 포옹으로 세계를 끌어않는, 그렇게 ‘긍정되는 현실’에 있기도 하다. 

서사의 중심축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가며 벌어진 일, 생의 시작이자 근원인 자연으로서 여성이 등장하며 전환하기 시작한 빛과 어둠.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현실의 스토리. 난 조심스레 이를 ‘김민희 이후의 홍상수’라 이야기해보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그의 영화는 가장 자연스레, 그리고 사소하고 장대하게 홍상수의 영화로 다시 골인한다.


홍상수 영화에, 집값 얘기가 새어나오는 기묘한 리얼리티


그리고 이번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엔, 코로나 이후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한 장면이 몇몇 스쳐간다. 정옥의 아들이 운영하는 떡볶이 집에 손님은 없지만 배달은 폭주하고, 상옥과 재연이 만난 인사동 술집 ‘소설'은 왜인지 ‘요즘 사람이 없고', 성옥과 정옥이 걷는 아파트 단지 길 사이엔 플라스틱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다. 게다가 둘의 대화에 등장하는...아파트 분양이 어떻고, 집값이 2억이나 올랐고, 저금 2억이면 아파트 살 수가 있네없네. 하지만 가까이 공원이 있고 강가에서 브런치도 할 수 있는, 이런 데가 실은 맞다는...이야기는 근래 우리가 무엇보다 자주 듣고, 말하고, 그리고 생각했던 그야말로 대한민국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 이곳에 있다. 투 헌드레드 싸우전드가 아닌, 2억원.  

다만 이번 영화에서의 그 ‘지금', ‘이곳'이라 함은, 어김없이 상옥이 지나온 수 십년의 세월 이후 ‘오늘'이고, 동시에 홍상수 영화가 밟아온 경계와 너머, 죽음과 생을 배회하던 날들, ‘그 후'의 오늘이다. 수백, 수천 번 반복되어왔던 오늘, 그리고 부정되었던 오늘. 하지만 다시 또 태어날 오늘이거나 살아남은, 그리고 이제야 찾아낸 오늘. 상옥은 외출을 준비하며 코트를 꺼내들고 ‘다시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상옥의 어떤 애절함이 ‘오늘'을 어떤 장대함의 기도로 만들었다. 



홍상수의 이번 영화를 보며 몇 편의 영화와 몇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런 경험은 내게 흔하지 않은데 그 중 하나는 심지어 영화와 관련이 없는 인물의 이름이기도 했다. 바로 지난 도쿄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했던 건축가 쿠마 켄고. 강가의 브런치를 마치고 그곳으로 ‘내려가’ 수풀에 둘러싸인 채 지난, 묵은 이야기를 꺼내 나누는 장면에서, 난 쿠마가 이야기했던 ‘건축은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란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와 달리 카메라는 대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인물에 근접해있고, 그 앵글은 조금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그렇게 상옥과 정옥이,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앵글 안에 하나의 그림으로 하나의 순간을 살아간다. 

정옥과 상옥의 이름이 단 한 자의 차이라는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영화의 초반 아파트 단지 공원, 지층에서 시작해 상옥이 머무는 13층으로 상승하던 움직임은 자연과 괴리된 우리의 일상을 고발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곧 자매 지간임에도 서로의 근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리고 못하는 그저 허울에 불과한 관계에 대한 은유는 아니었을까. 담배를 피는 상옥과 피지 않는 정옥은 징검다리 몇 개 사이로 각각 물과 뭍에 자리하고, 다리 아래 자세를 낮추고 담배를 피우던 상옥의 모습이 난 왜인지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보다 가깝게 보다 낮게. 산 너머, 구름 너머 실체의 형상을 쫓던 홍상수는 지금 가장 가까운 땅과 바람, 그리고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건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오늘의, 현실에 안착한 홍상수의 영화라는 생각이, 마치 보지 못했던 오늘처럼 무심히 스쳐가고 있었다.


보다 가깝게 보다 낮게, 그리고 이혜영이란 새 얼굴



영화를 보며 떠올랐던 영화 관련 인물과 작품을 얘기하면, 그건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과 그 주인공 루이, 그리고 클레어 드니 감독의 4년 전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의 줄리엣 비노슈가 연기한 이자벨이다. 다소 상투적으로 난 이들 사이의 ‘접점'을 상옥에 내재된 귀향과 비밀, 곧 자아와 피아 사이의 ‘돌아감'이로 보았는데, 이 영화엔 플래쉬백으로 오늘에 끼어드는 어제가 아닌, 오늘의 시점에서 재연되는 어제의 기억이 있다. 택시의 방향을 돌려 방문한 이태원 어느 주택에서, 상옥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집에서, 집은 어느새 카페를 겸하는 편집숍이 되었지만 정원은 십 수년 세월 속 그대로이고, 상옥의 오늘은 그렇게 오래 전 오늘과 조우한다. 마치 루이가 자신의 방 안 먼지가 뽀얗게 쌓인 가구를 쓰다듬으며 어제를 떠올리는 것처럼. 

심지어 상옥은 그 집 어느 구석에서 한 소녀와 마주한다. 그곳의 소녀라면 집주인, 집은 인천이라는 집주인의 딸이어야 할텐데, 소녀는 자꾸만 집이 이곳이라 말한다. 두 번의 질문과 두 번의 대답을 거쳐, 두 개의 답과 두 개의 질문을 남기고. 어쩌면 소녀는 어릴 적 상옥의 재현이었을까. 그곳의 오늘은 지금인 걸까 아니면 지나간 지금인 걸까. 하지만 상옥은 그저 소녀를 껴안고 우린 그렇게 긍정되는 하나의 ‘오늘'과 마주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마당 정원처럼, 그저 먼지가 쌓여있을 뿐 다시금 재생되는 그 날의 기억처럼. 결국 존재하는 건 ‘오늘’이란 시제 뿐. 영화의 초반 ‘오랜만'이라는 정옥의 말에 다소 히스테리하게 반응했던 상옥의 얼굴을 떠올리면, 세상엔 그저 ‘오늘' 만이 존재할 뿐이다. 



홍상수 감독의, 다시 이야기하면 27번째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는 어쩌면 캐스팅, 단 87분의, 하루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등장 인물들의 면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전작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홍상수 감독작에 출연 경험이 있는 배우들이 다시 또 등장하지만, 유독 상옥을 연기한 이해영 만이 처음 보는 얼굴이다. 상옥과 정옥의 산책길에서 마주친 두 여자 커플은 ‘도망친 여자'에서의 영순과 동거녀로 출연했고, 정옥을 연기한 조윤희는 ‘인트로덕션'의 영호 엄마, 그 영호를 연기했던 신석호는 이번에도 정옥, 조윤희의 아들이다. 심지어 그의 여자 친구는 ‘인트로덕션’에서도 석호의 여자 친구였다. 그에 더해 상옥과 만나기로 예정된 영화 감독과 조연출은 ‘도망친 여자'에서 작가였던 정선생이거나 홍상수의 페르소나 권해효, 그리고 ’인트로덕션'의 영호 친구 하성국이다. 

이 쯤 되면 단순히 홍상수 영화의 단골들이 또 한 번의 출연한 것이 아니라, 홍상수 영화들의 ‘재회'처럼도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 유독 이해영 만이 ‘새롭다’. 이건 단순히 의도된 우연이었을까.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홍상수의 얼굴과 얼굴들 사이로, 처음 등장하는 이혜영. 상옥의 목소리는 종종 장미희의 억양을 연상케 하고, 홀로 나레이션의 대사를 읊는 몇 번의 '장면 밖' 이야기를 지나, 그의 얼굴은 어쩌면 이 영화가 향하고 있는, 도달해야 하는 ‘오늘’의 종착점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 새로운 얼굴이란 새삼 무슨 의미일까.


너의 얼굴과 나의 얼굴 앞


상옥의 어느 아침에서 시작, 다음 날 아침에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일종의 ‘수미상관’적 엔딩을 갖고있다. 단 하루만을 보여주고 상옥을 연기한 이혜영은 홍상수 영화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우린 이미 그의 모든 걸 알고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만이 진실, 얼굴 앞에 보이는 것이 은총입니다.' 어쩌면 오늘이 전부, 모든 것이다. 상옥은 몇 차례 어제의 기억에서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금새 기도로 맘을 다잡고 재연과 술김에 나눴던 약속은 그저 오지 않은 미래의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상옥의 오늘 속에, 이미 어제가 되어버린 그 오늘엔 실체를 마주했던 날들의 빛바랜 기억이 얼룩처럼 남아있다. 물론 떠나간, 그리고 잊혀질 날들일 뿐이지만, 정옥 아들의 떡볶이집에 들렀다 묻은 양념 자욱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재연이 오래 전 상옥의 영화, 아마 (이혜영이 출연한) ‘겨울 꿈은 날지 않았다'의 한 장면을 이야기할 때, 난 홍상수의 영화 ‘그 후’ 속 김민희가 차창을 내리고 밤하늘의 눈을 바라보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게 기억되는 오늘과 시작되는 오늘. 함께 할 수 없음에 울먹이는 재연 곁에 상옥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손을 내밀고, 어쩌면 난 그 순간이 이 영화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은 볼 수 있다. 



다시 이 영화의 첫 장면. 수미상관의 시작이자 마지막. 혹은 너의 뒷모습이자 나의 얼굴 앞. 전날 밤 좋은 꿈을 꾸었다는 정옥은 다시 잠에 든 아침이고, 그를 바라보는 상옥은 전날과 달리 자리를 옮겨 정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의 얼굴 앞에서. 재연과 나눈 술김의 약속은 없던 일이 되어 핸드폰 녹음 파일 속에 묻혀 버렸고, 비내리던 밤도 그저 베란다 창틀에 맺힌 물방울이 되었다. 좋은 꿈은 12시간 내에 말하면 안된다고, 정옥은 그랬는데 그 꿈은 발화가 되었을까. 오직 지금, 오늘에 머무는 홍상수의 보기 드문 이 영화에서 유독 (우리에게) 소외되어 있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건 정옥이 이야기한 꿈과 상옥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 앞 모든 것이고, 영화는 얘기되지 않은 꿈을 남겨둔 채, 정옥을 바라보는 상옥의 모습으로 이야기의 문을 닫는다. 



또 하나의 오늘이 저물어간 이른 아침, 상옥은 이야기한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상옥은 정옥의 꿈 이야기를 아마 듣지 못했지만, 알고있고,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본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이미 얼굴 앞에 다 완성되어 있어요.” 지난 밤 재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래전 영화 속 비둘기에게 했던 것처럼, 상옥은 잠자는 정옥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는 그곳에 태어나는 구원을 바라본다. 상옥이 이야기했던 얼굴 앞 모든 것이 은총이라면, 아마 그를 바라보는 우리 눈앞의 모든 건 구원. 나는 당신이 보는 것을 볼 수 없지만, 당신 얼굴 앞에 스쳐간 천국의 '오늘'을 볼 수는 있다. 당신이 그곳에 내민 손, 거리로 환산되지 않는 당신 얼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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