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를 위한 상처 투성이의 청춘 엘레지, '우린 모두 어른이 되지 못했다
'46세, 시시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영화는 이 문장에서 시작한다. 무슨 일인지 술을 많이 마신 새벽이고, 쓰레기 가득 쌓인 거리에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시절은 2020년 도쿄, 그리고 이른 봄. 하늘엔 올림픽을 알리는 현수막이 줄줄이 시절을 얘기하는데 왜인지 싸늘하다. 잘 자지 못하고 일어난 아침이 이런 모습일까. 알람 소리에 맞춰 집을 나서고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타고 출근, 그리고 퇴근. 그런 흔하고 흔한 하루. 이제는 하나의 애수가 되어버린 것도 같은 어느 도심의 아침이, 그 시절의 뉘앙스가 아직 잊혀지지 않고 그곳에 있다. 술에 취한 저 남자는 어제를 살고있을까. 아니, 까마귀 울음 소리에 이끌려 이미 '오늘'의 안에 도착해 있을까. 나는 그 날의 너가, 그 새벽녘의 너를 바라보는 나의 아침이 참...외롭다 생각했다.
경제가 호황을 누리다 추락에 빠지고, 월드컵 첫 출전에 환호를 하다 3연패에 좌절하고, 세기말 카운트타운에 심드렁한 냉소를 지으면서도 홀로 셀렘을 느끼던... 그런 시절이 흘러흘러 어느새 30, 그리고 마흔의 중턱. 어쩌다 우린 모두 어른이 되어버렸다. 변하지 않은 시부야 뒷골목을 걸으며, 간판만 바뀐 후미진 구석의 러브호텔을 지나치며, 우린 그렇게 조금씩 더 어른이 되어간다. 변해가는 것과 남아있는 것. 그리고 너의 오늘과 나의 어제. 우린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정말 어른이 되기는 했을까. 오자키 유타카가 세상을 뜨고, 20년이 되었다고 TV 속 아침 방송이 이야기하던, 4월의 그 아침이었다.
얼마 전 레터를 발행하며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말을 하나 인용했다. "넷플릭스는 '영화가 되지 못했던 것들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예상 밖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었는데, 표현 수위 면에서, PPL이나 기업・상품명에 대한 검열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스케일이 다른 자본력의 환경이란 분명 보다 넓은 '품'의 영화를 만들어 내고있는 것이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킨 어떤 외부로부터의 변화, 그런 사건. 하지만 이런 건(자유, 표현...뭐 그런 것) 꽤나 어려운 문제이고, 굳이 지금의 타이밍에 꺼낼 '의제'는 아니니, 그보다 난 '작품의 다양성', 넷플릭스로 인해 하나의 작품이 된, 혹은 될 수 있었던 영화들의 경향성을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기존의 쟝르, 감정의 분류를 떠나 어떤 '사이'에 존재하던 '이야기'의 '태어남.' 바꿔 말하면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못했던 외부 세계의 새로운 진입.
물론, 그저 플랫폼에 빗대 간편하게 'OTT물'이라 말해볼 수도 있지만, 전에 없던 '표현의 품', 그 안에서 태어나는 건 분명 환경의 조건이 아닌, '하지 못했던 말의 이제야 할 수 있는 이야기', 어쩌면 우리 일상을 닮은, 시대의 변화이거나 매스(Mass) 보다는 개인, 다양성과 함께 확보되는 '개인의 서사'에 보다 기인한다. 말하자면 시절의 변화와 함께 소환되고 있는 (고작) 너와 나의 이야기. 그런 '시차'의 이야기. 예를 들면 위에서 적었던 어느 비루한 어른의 술에 젖은 지루한 아침과 같은 것이 영화가 되어 전세계적으로 '상영되고 마는' 오늘과도 같은 것들. 지난 10월 일본에선 극장 개봉과 동시에, 한국에선 넷플릭스 독점으로 '우린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僕たちはみんな大人になれなかった。)'란 영화가 공개됐고, 난 이건 '될 수 없었다'가 아니라 '되지 못했다'라며 혼자 중얼거리고 말았다. '개인'이 보다 드러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오해'는 곧 하나의 메시지, 그런 새로움이곤 하니까. 영화는 가장 사소한, 그리고 완벽하지 못했던 완전함의 시절을 이야기하다.
제목부터 지금, 시대를 벗어나 있는 영화 '우린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를 대략 정리하면, 이 영화는 '어른이 되고싶지 않았던 청춘의 어른이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본래 cakes란 블로그 사이트에 연재가 되었던 것이 시작이고, 이후 단행본이 출간, 작가는 이름을 '모에가라(燃え殼)'라 쓰는 40대 중년의 남성이다. 이후 작품은 테레비 CM, 뮤직 비디오 등을 만들었던 모리 요시히로 손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모에가라 씨는 73년생, 모리 감독도 82년생, 마치 일본의 서브 컬쳐가 대중 문화와 반대 지점에서 번성하던 시기, 그리고 그 잔해를 흡수하며 자란 세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오자와 켄지와 덴키 그루브(電気グルーブ), 데이비드 린치나 소마이 신지의 영화, 그리고 오자와 유타카로 대변되는 젊음과 반항의 에너지가 문화의 한 축이 되어 파편처럼 쏟아지던 시절. '서브 컬쳐'는 젊은 세대, 그 일상의 전반이었고, 8090을 부정하며 비로소 싹을 틔었던 그 '반동의 컬쳐'는 버블 붕괴 이후 젊은 세대에게 '살아가다는 것'의 방향을 제시해준 노래 그리고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작고 여리고 하지만 완전한. 극중에서 카오리(이토 사리)는 처음으로 오자와 겐지를 알게된 건 '천사들의 신(Scene)'이라 자기소개를 하듯 말하고, 1999년에 발표된 그 곡은 이렇게 노래했다.
해변을 걷는 사람들이 모래 사장에 / 멀리 길게 발자욱을 남긴다 / 흘러가는 여름을 씻어내는 빗줄기가 / 떨어지기 전까지의 너무나 짧은 순간 / 진주빛 구름이 떠오른 하늘에 / 누군가가 뛰어올린 풍선이 날아가고 있어 / 역에 전차를 타려고 서있는 나와 붐비는 행렬의 몇몇 사람이 / 하늘을 올려보며 (풍선의) 향방을 생각하고 있어 / 언젠가 누군가가 꽃을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고 / 대답이 아닌 말들을 이야기한다면 / 몇 천 번의 계절이 지나간 뒤의 계절이 / 나에겐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질거야
파도에 지워질 발자국, 어느새 사라져버린 하늘의 풍선, 그 날의 구름은 왜인지 유독 꽃빛 같았고, 곁에 선 너에게서 난 왜인지 내일을 예감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지나감, 오지않음, 보이지 않지만 꿈꾸는, 그렇게 이곳에 자리하지 않는 '언젠가'에 대한 애달픔. 소위 영화의 소위 '에센스'란 이런 것들이었을까. 영화는 소설의, 어쩌면 전부이기도 한 그 당시의 냄새, 멜로디, 사운드와 진동을 어떻게든 그대로, 조금의 발색도 없이 스크린에 옮겨 놓으려 한다. 마흔을 훌쩍 넘은 그곳에서,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도쿄의 거라 안에서. 시간은 2020년에서 시작, 카오리와 사토(모리야마 미라이)가 처음 만났던 1991년의 하라쥬쿠와, 젊을 때의 생기는 어디가고 '평범한' 사회인이 되어버린 1995년, 그리고 그렇게 끝나버린 사랑의 1999년과 모든 게 기억 속에 묻혀버린 마흔 여섯의 지금, 그 사이를 맴맴돌고, 깨져버린 유리잔의 조각처럼 어제의 기억은 그저 파편이 되어 오늘 안에 '이따금' 재생된다. 모두 과거 완료형이 되어버린 날들에 대한 다소 산발적인 회고.
시부야 뒷골목의 2020이 아닌 1980년, 하라쥬쿠 '라포레' 사거리에 '도큐 프라자'가 들어서기 이전의 90년대 하라쥬쿠. 아직 레코드숍 'Wave'가 문을 열던 시절의 시부야와 그런 오래 전의 너와 나. 영화엔 플래쉬백이라 칭하기도 무안하게 과거의 조각이 산재하고, 영화적으로 득이 될지, 실이 될지를 떠나, 이 영화는 분명 술에 취해 괜한 추억에 잠긴, 그런데 그게 하필 80년대라는 세대적 특성 탓에 벌어지는, '도쿄와 나' 사이 오랜 이별의 후일담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만큼 어제를 잊지 못하고 있는걸까. 혹은 우리에게 '끝나지 않은 오늘'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46살 남자의 '우린 모두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애초 오래 전 어딘가 우리가 두고 온, 너와 내가 나누는 말이라고 난, 생각하고 말았다.
'우린 모두 어른이 되지 못했다'를 구성하는 스토리란, 사실 시제를 달리한 '오늘'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펜팔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웨이브' 비닐 백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좋아하는 뮤지션과 노래로 호감을 표하는 일련의 과정이란, 이제는 사라진, 혹은 발색된 남녀 관계의 작동 방식을 시계를 거꾸로 돌려 그대로 재생하고 있을 뿐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녀가 만나고 연애를 하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극히 진부한 러브 스토리. 하지만 여기엔 오직 그들에게만 존재하고 작동하는, 오직 그들에게 밖에 없어 (사회) 통용되지 못하는 미완의 작은 우주가 있고, 그건 곧 그 시절의 세상 전부이기도 했다. 술에 취해 거리에 주저앉은 밤도 일으켜세우는, 오자키 유타카 노래거나 오자와 켄지의 앨범 '혜성'에 대한 뜨거운 토론들.
그렇게 이 영화는 사토와 카오리의 스무살 언저리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걸었던 그 시절에 매료되어 있고, 고작 기억 밖에 남지 않은 어느 어른의 회상을 통해 오늘에서 어제를 이야기한다. "넌 분명 괜찮아. 재미있으니까." 모든 게 서툴던 시절 처음 찾은 러브호텔에서 카오리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난 그럴 용기가 없었고 TV용 짜투리 자막이나 만드는 영상 디렉터 사토는 지금 어제를 돌아보며 오늘을 걷는다. 완성되지 못한 어제가 아닌, (어쩌면) 아직 남아있는 어제를 향해. 평범한 어른이 품고 있는 '평범하지 않았던 시절'이란, 사회 생활을 하기에 하등 쓸모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자꾸만 스쳐가는 기억의 '오늘'이 난 자꾸만 사무칠 뿐이다. 일본에선 이 영화를 설명하며 '에모이(エモい)' 한 단어로 표현했다.
소설가를 꿈꾸는, 하지만 평범한 영상 디렉터가 되어버린 한 남자의 회고로 문을 여는 이 영화는, 애지감치 결론이 부재한 스토리다. 꿈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고, 사랑은 했으나 이별이 시작됐고, 스무살 무렵 '난 다르다'고 느끼며 살았던 날들은, 하루하루 살기 바쁜 (어른의)일상에 일말의 '훈장'도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끝나버린 스토리의 리와인드. 그런 이유로 소설은, 그리고 영화는 다수의 플래쉬백을 사용, 어제와 오늘, 지금과 그 때를 무작위로 섞어놓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너무나 내 얘기같아, 그저 너무 '리얼'해 영화로서의 맥락, 소위 '돌아봄'의 서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90년대와 2000년 이후의 일들이 산발적, 산재하고 있을 뿐이고, 텍스트에서의 애잔한 기억, 맥락 사이의 흔적이 그저 무분별하게 어질러져 있다는 인상이다. CM을 만들던 감독의 연출이라서일까. 이 영화의 각본은 오보미 감독의 명작 '오직 그곳에서만 빛이 난다'를 썼던 타카다 료우의 솜씨다.
난 그렇게 꽤나 실망을 하고 말았는데, 다만 영화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시 원점, 오프닝의 술에 젖은 그 골목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렇게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되는 장면에, 난 삶이란 제자리에서의 쳇바퀴, 쳇바퀴 안에서의 오늘과 내일. 그렇게 다시 돌아오고 돌아보는 어제와 오늘, 그런 결코 끝나지 않는 '하루'와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쳇바퀴를 굴리는 다람쥐에게 마지막이 없는 것처럼, 매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영 '내일'은 오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나온 그곳을 살아갈 오늘의 너처럼.
영화의 엔딩, 사토의 질주와 함께 흘러나오던 오자와 켄지의 '천사들의 신'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스럽게 태어나 / 자라나는 써클 / 너와 나를 이어주는 상냥한 / 끝나지 않는 법칙 / 큰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소나기 한 가운데서 / 아이들이 약속을 나누고 있어
이 영화의, 소설의 제목이 '나'가 아닌 '우리'인 건 아마 이런 '작은 우주'에서 쓴 문장이어서일까. 오자와 켄지를 좋아하는 너가 있는 것만으로 완벽했던 시절, 그 하루가 오직, 그곳에서만 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