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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14. 2023

어느 뺄셈의 상처学,
다시 복구될 수 없음에 관하여

프랑소와 오종의 '그'의 집을 다시 한 번 살다, '피터 본 칸트'





영화는 문을 걸어 잠근다. 이름 모를 남자의 두 눈을 바라보는 듯 스쳐가고 도착한 2층짜리 저택엔 아직 밤이 다 그치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를 빈틈없이 단장한, 콧수염도 단정하게 매만진 마른 체형의 남자가 조심스레 정적을 가르고 방으로 이동하더니 커튼을 열어 젖힌다. 단숨에 채도가 밝아지는 이 전환의 장면은 다소 불안하게 다가오는데, 그에 깨어난 피터, 즉 주인공 남자도 ‘좀 상냥하게 해주지 않겠어’라고 했으니, 아마도 ‘젖혀버린다’가 맞을 것이다. 밤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돌연 드리운 바깥으로부터의 햇살이란 그만큼의 당혹스러운움 좀 음산한, 결코 상냥하지 못한 자극인 것이다. 알 수 없어 불안하게 남은 어느 진입 이후의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들 사이  충동들. 영화가 시작하고 5분 남짓, 근데 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 걸까. 


피터와 페트라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1년 영화 ‘페트라 본 피터’를 원작으로 했다고 알려진 프랑소와 오종의 이 영화에서 시작은 이미 많이 진전되어 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며 집 안에 머물고만 있지만, 이미 ‘그곳’에 도착한 뒤의 이야기다. 영화 초반의 남자는 파스빈더일 것이고, 무대가 된 집은 그가 살았던, 서른 여덟 짧은 인생을 보내며 영화를 만들었던, 동시에 세상과 단절될 수 있었던 바로 그 공간일 것이다. 오직 그곳에 들어서기 위한 어느 시점의 과격한 이동. 이곳에서 모든 건 이미 벌어진 뒤 그 후의 상황이다. 즉 어떤 상태의 영화를 우린, 뒤늦게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면 피터는 연인 프란츠와 얼마 전 헤어졌고 상처를 추스리지 못해 괴로워하고, 그렇게 영화 초반을 읽어보면 실연한 남자의 아침 풍경으로 별 무리없이 이해될 수 있다. 피터의 관점으로 바라본 일상이 그를 매개하는 또 한 명의 유사 피터(오종의 카메라)를 통해 이곳에 전달된다. 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 사이의 작동하는 어떤 액자 구조의 화법이 이곳에 작동한다. 파스빈더의 엣 영화를 리메이크하며 오종은 그 시절, 장소, 곧 그의 두 '시선' 안에 입장해야만 했을 것이고, 그건 즉 다시 말해 철저하게 그 시대의 그를 다시 한 번 살아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다시 문으로 들어서는, 이상한 회귀의 영화. 영화가 시작하고, 카메라가 꺼질 때까지 '그'는 결코 집을 떠나지 않았다.



1과 2와 3. 3에서 하나를 빼면 2가 되고, 2는 때로 1이 되었다 다시 2로 돌아온다. 어쩔 때 그 3은 다른 4로 대체되기도 하고 영화의 후반부 피터의 생일을 맞아 인물들이 대거 입장을 하기 전까지, 이곳엔 극히 한정된 소수의 인물들 만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 주인공인 피터(드니 메노세)와 그를 보조하는, 비서이자 어시스턴트이자 가정부이자 대필 작가인 칼(스테판 크레용), 그리고 침대 맡에, 그리고 방과 거실 곳곳에 사진과 음악이 놓여있는 배우 시도니(이자벨 아자니), 이렇게 3. 피터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고 시도니는 그의 영화에 이미 한 차례 출연한 적이 있고, 동시에 피터에겐 자신의 이상을 구현해주는 대체적 페르소나로서 절대적 존재이기도 하다. 뒤늦은 아침에 일어나 칼이 갈아 준 오렌지 쥬스를 한 손에 들고 피터가 하는일이란, LP에 레코드를 걸고 시도니의 음악을 틀고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 이와 같은 구도의 영화에서 각각의 인물은 하나의 대립항으로서 이야기의 얼개를 조립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오종은 파스빈더의 ‘ 페트라 본 피터’를 원작으로 했다. 마찬가지로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와 모델 지망생, 그리고 그와 관계하는 최소한의 인물만이 등장하여 소유와 질투, 억압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권력 관계를 탐구한 70년대 뉴저먼 시네마의 대표 작품. 오종은 이를 거의 작품 전반의 토대를 그대로 복사한 듯 베껴오며 주인공의 직업 만을 패션 디자이너에서 영화 감독으로 바꿔놓았다. 그 외 상영 시간이 30분쯤 더 짧은 것을 제외하면 원작의 디테일까지 최대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도 오직 주인공의 이름만이 달라져있다. 


문의 열쇠를

걸어잠근 액자 영화



하지만 여기서 오종과 파스빈더 영화의 유사성은 좀 다른 맥락의 성격을 갖는다. 일종의 이중적 액자구조가 그와 그를 갈라 놓는다. 오종의 이 영화에서 파스빈더, 그의 삶은 다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페트라가 아닌 피터로서 파스빈더의 작품이 계승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렌지 주스를 손에 들고 시도니의 음악에 춤을 추며 피터는 매우 행복하다. 조금 전 칼에게 성질을 내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피터는 음악에 매우 심취해있다. 다소 미세하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뮤지컬적 기법이 삽입된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이미 프레임 너머의 너머, 피터의 방 안에 도착해 있다. 그렇게 피터가 보여진다(이야기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그 사이의 전이가 자아내는 어느 교란의 풍경이 그곳의 프레임을 지우고 서로 다른 시간 사이 와해된 가공의 시간을, 우리에게 도착, 보이게 하는 것이다.

피터의 명령 하에 그곳엔 무엇이든 발생할 수 있고, 그의 움직임 시선에 따라 화면은 움직이거나 정지하고, 일견 칼은 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곳의 모든 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피터의 시야 안에서만 움직인다. 영화의 시작 무렵, 그리고 중간의 서너 번. 카메라가 밖을 나가 외부에서의 집을 보여줄 때, 그곳에 피터 만이 유일하지 않음을 환기하는 그 장면은 왜 이리 쓸쓸하고 두려울까. 유럽 중세의 전형적 양식으로 지어진 안뜰을 낀 그 저택은 흡사 웨스 앤더슨의 미쟝센에서 따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외떨어진.  Peter von Kant. 풀어보자면 칸트 출신의 피터 씨. 영화는 문을 걸어 잠갔고, 세상엔 문단속을 하고나서야 겨우 말할 수 있는,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다분히 연극적인 무대 안에서, 피터의 2층 벽돌 주택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 벌어지는 이야기란, 꽤 선명한 갈등 구조와 전개 양식을 따라간다. 파스빈더의 이전 작품 ‘페트라 본 칸트’가 그려냈던 관계 내 권력 구도, 사랑의 외피를 두른 소유랄지 욕망,  억압과 결국은 실패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 어김없이 작용하고 마는 어떤 질서에의 집착이 오종의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벌어진다. 시도니의 소개로 알게된 아미르는 스타가 되고싶은 욕망이 있는 젊은 청년이고, 피터는 그를 본 순간 그에게 사랑을 느꼈고, 이는 빤히 도출되는 명성있는 감독이나 디자이너나 기업가의 권력에 의한 사랑, 곧 지배와 억압의 전형적 예시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우린 얼마나 그의 사랑을 신용할 수 있을까. 피터 자신은 과연 자신의 사랑을 에두른 억압,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의 문제. 사실 이건 모두 그를 전시하기 위한 밑그림에 불과하기도 하다. 

피터는 전 남친 프란츠와의 사랑을 믿었다 크게 실패한 뒤 증오 만이 남은 상태인데, 정녕 실패하지 않는 ‘오직 사랑만의 사랑’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오종은 설마 다시 한 번 묻고 싶어한다. 그를 위한 무대를, 칸트가 아닌 괴른의 피터 집안에 그 나름대로 차려놓은 셈이다. 여기서 오종은 파스빈더로부터 자신의 세계로 멀찍이 도망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편의 영화가 시작한다. 그를 마당 삼아 인간의 욕망이, 사랑과 미움이, 권력의 이동, 즉 자리 바꾸기의 말들이 날뛰고 있다. 피터는 프란츠를 잊었고,  아미르가 시도니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이 그들의 무대, 즉 피터의 저택은 완전한 2인칭의 공간이 되어있다. 아미르가 호텔에서 집을 싸와 피터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을 때 관계의 저울추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그는 왜 알지 못했을까. 아니면 모르려 했을까. 아니 그건 정말 사랑이었을까.  


사랑 빼기 슬픔

그리고 남은 것들



피터는 아미르와의 사랑을 얻어 행복에 빠진 줄 알지만, 얼마 가지 못한다. 영화 한 편을 마쳤을 뿐인데 둘은  욕망이 되어 서로를 할퀴고, 눈물로 고함으로 관계를 일그러뜨린다. 나아가 성공한 아미르가 떠난 자리에 피터는 다시 또 폐인이 되어있다. 그는 칼을 고함쳐 부르며 진토닉을 연거푸 들이 마신다. 얼핏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도 같지만, 1이 아닌 2의 실패이고, 사랑도 소유도 억압도 성공하지 못해 채 상실 만을 남긴 피터의 술에 찌든 하루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여기서 영화는 빛이 나기 시작하는데 모든 것이 무너진 뒤, ‘모든 사람들이 그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고 노래하던 노랫말 그대로, 폐허가 된 피터의 시간 속에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사랑, 아니면 사랑이었을지 모를, 혹은 욕심이거나 집착이었을지라도 분명 사랑인 것 같은, 그 가장 무언가의 감정이 눈물에 젖은 초췌한 얼굴에 전해지는 것이다. 피터는, 오종은 왜 그렇게 깊은 줌업으로 그를 바라보고 싶어했을까.

영화의 시작 전 두 눈의 파스빈더거나 지금 이곳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피터의 눈물 자국이거나. 그건 정녕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문을 걸어 잠그고, 모두가 다 떠난 자리에 철저히 혼자가 된 그 사랑이란, 어떤 헤어짐, 때로는 알코올 한 잔 곁에 비로소 남아있을 뿐이다.



영화의 얼개를 쓰기 시작해 어쩌다 엔딩까지 서술해버렸다. 이는 상영 시간이 85분, 비교적 짧은 탓일지도 모르지만, 영화 자체에 스토리가 헐거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보다는 영화 자체가 다소 1인칭적, 모놀로그의 성격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물론 1차원적으로 주인공 피터의 이야기가 주축이 됨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오종의 영화는 이곳에서 피터의 기쁨과 슬픔, 즉 흥망성쇠를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프레임 너머의 프레임, 영화를 내부에서 바라보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바라보게 하는, 매우 내밀한 이 영화만의 어떤 중층적 구조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까지 좀처럼 피터의 집을 떠날 줄 모르는 공간의 사용법이 그러한데, 여기서 공간이란 곧 피터의 육신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피터의 기억에 의해, 혹은 시도니가 듣고 온 거리의 풍문들로 다소 외부의 사정들이 개입하기는 하지만, 오로지 그의 일거수일투족, 24시간의 행동 반경이 영화의 프레임, 즉 그 세계의 틀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그 집은 작고도 완전한다.

좀 다른 예를 들어보면, 오종의 이 영화만큼이나 집을 떠나지 않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에서 오랜 간호에도 세상을 뜬 아내 안느의 떠나고 비어버린 자리를, 영화는 왼쪽 거실과 오른쪽 침실의 세계로 양분해 표현한다. 미카엘 하네케의 가히 마술적인 카메라로 찍힌 장면인데, 그곳에 남겨진 그 아무것도 아닌, 공백의 자리란 여지없이 안느의 부재를 의미하는, 자체로 세계의 한 축을 감당하는 무게로 갈음된다. 이를 과연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와 비슷하게 오종은 일견 앤더슨의 세계에 도착한 것 같은 피터의 집을 그곳에 지은 뒤, 시점의 교차와 묘한 이중의 액자 구조를 겸비해, 오직 피터, 그에게서만 문을 열고 닫는 집을 만들어냈다. 무엇을 위해? 성공도 하고싶고 하지만 작품을 훼손하는 건 화가 나고 그럼에도 투자 소식엔 다시 또 웃음이 나는 그 인생을, 너무나도 모순적이라 인간같은 그 육신의 생을 다시 한 번 긍정해보기 위해서. 오종은 여기서 잠시 그 실패한 삶, 눈물 밖에 남지 않은 이별 후의 상처가 되어본다. 조건없는, 겸손도 질서도 없는 사랑의 어느새 욕망이 되어버린 그 상처난 사랑 만을 위해서.


피터와 칼의 이별



파스빈더의 원작을 이유로 오종의 이번 영화를 권력과 자유, 억압과 소유 등 인간의 갈등이 오가는 인간 군상극이라 평하는 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물론 영화는 파스빈더의 사회를 직격하던 날카롭고 치열한 비판 정신을 훌륭하게 답습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세계란 좀 더 내밀한 곳을 저격한다. 영화의 초반, 실연을 당한 피터를 위로해주겠다며 시도니가 자신의 연애 철학을 늘어놓을 때, 상류층 인물들의 이러한 대화가 금방 전복되는 걸 우린 수도없이 목격해왔다. 피터는 시도니와 달리 게산도 없이 본능과 순수한 감정 만으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시도니는 어떤 경우에도 질서와 규칙이 있어야 토로한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둘이 자신이 뱉은 말에 걸려 넘어진다는 건, 불보듯 빤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위선자로서 그려지는 건 별로 아니다. 오종은 오히려 그래서 드러나는, 완전한 사랑도 적절한 규직이나 질서도 모두 실패한 뒤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의 세계를 이야기하려 한다. 난 자꾸만 극중 몇 번이나 소리쳐 부르던 칼이 피터, 그 자신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어버렸는데, 시도니의 앨범을 틀어놓고 음악에 흠취했을 때 그 음악이 곧 피터 그 전부였던 것처럼, 일상의 대다수를 거들어주는, 아니 오히려 그를 대신하기도 하는 칼의 존재란 집에 틀어박혀 세상과 고립된 피터 자신을 유일하게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최소한의 커넥션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아마도, 그인 것이다. 영화에선 대부분 생략되어 있지만, 피터 그 자신이 집 밖을 나서 이뤄낸 성취란 곧 칼의 공로이기도 할 테니까. 



50년이 지난 영화, 그럼에도 남아있는 메시지, 혹은 눈빛. 영화는 파스빈더의 두 눈만을 바라보는 초상으로 시작해 또 한번의 사랑을 잃고 눈물을 글썽이는 피터의 얼굴에서 막을 내린다. 그 곳, 그 세계를 향한 카메라의 앵글은 계속 더 작아질 수 밖에 없어 피터는 초근접 클로즈업을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자신을 향한 클로즈업의 카메라 렌즈에 두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걸 죽이고 있다.’ 오직 실패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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