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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n 29. 2023

Being There 건축을 닮은 영화
영화가 된 도시

익숙한 것들이 전해주는 혹은 발견한, 내 삶의 '가지 않은 길'에 관하여





어느 오후 평범한 동네에서 그 혼잣말은 그곳의 건물을 닮았다. 면접을 준비하는지 담배를 손에 쥔 여자는 어딘가 초조해 보이고, 무언가를 외는 듯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와 문, 시계도 비대칭입니다.’ 실제 미국 인디애나 주 인구 40만 남짓의 작은 마을 콜롬버스에서, 최초의 교회 건축이라 알려진 ‘노스 크리스쳔 교회’ 앞에 도착한 영화는 실재하는 건축을 묘사하며 시작을 연다. 1920년대 근대 모더니즘 건축이 태동하고 기능주의 관점의 역사적 건축이 다수 남아있는 그곳에서 이 영화는 마치 그 마을에 무대를 편 것만 같다.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이 현실의 그것과 오버랩되고, 부러 그를 서술하며 영화를 그곳에 불러낸다. 프레임 안과 밖을 새로 쓰는 듯한 실험처럼 들리지만, 별 다른 (영화적) 수고없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좌우를 접어놓은 듯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건물은 거리 곳곳 단정한 마을을 이루고 소위 모더니즘이라 불리던 자로 잰듯한 양식의 반듯한 건축은 영화 속 디오라마, 곧 영화 안에서도 실존하는 서사의 구조물이 되었다. 영화 속 현실과 그 밖의 시공간은 어느새  희미해져 지금 여기엔 오직 이 영화의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모더니즘 건축의 미적 양식은 영화의 미장센으로, 당시 건축이 지향했던 사상과 분위기는 영화의 내적 내러티브가 되어 작동하는 식이다. 


건축에서 시작하는 영화



이렇다할 특별한 설정없는, 그저 영화의 장소가 유독 건축이 풍성한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인 이 영화는 묘하게 그렇게 그곳에 스며든다. 시간은 어느새  이곳의 장소가 되어버렸고, 오래 전 시간을 그대로 필름 위에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경험같기도 하다. 어딘가 좀 이국적인 오즈 야스지로. 즉, 아무런 경계없이 현실을 영화에 담아낸 소박한 결과물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범하고 또 비상하다. 건축의 영화가 아닌 건축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 이런 그림이 될까. 

이름도 특이한 코고나다 감독은 자신의 장편 데뷔작 ‘콜럼버스'에 대해 1920년대 모더니즘 건축에서 받은 영감이 영화의 시작이 되었다’고 말했다. 실로 메이킹 관점에서도 현실을 팔레트 삼아 영화를 찍어낸 셈이다. 근대 건축이 성했던 도시 콜럼버스에서 영화는 1920년대 그 무렵에 머물며 오늘을 말하고, 그저 오랜 기억이거나 회상, 혹은 그 기억의 재연에 불과할 이 시도는 그런데 가장 자연스러운 영화, 어쩌면 그 시작일 것 같은 영화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영화와 함께 마치 그곳에 삶이 시작해,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사리넨의 디자인은 비대칭 속에 균형이 있죠.’ 영화적 픽션이 아닌 역사적 건축에서 출발한 영화는 마을에 숨은 작은 이야기에 문을 열고, 그곳에 말은  곧 시간이 되어 그리고 다시 기억이 되어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그냥 그 곁에 있을 뿐. 이를 건축에 담긴 우리의 오랜 모놀로그, 그런 이야기라 말해 볼 수 있을까.  어느 평범한 오후 동네에서 혼잣말은, 영화를 닮아있었다.




건축이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그런 역사의 마을 콜럼버스를 배경으로, 제목까지 그렇게 지은 영화이지만, 이야기를 시간으로 엮어내는 건 두 명의 여자와 남자이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남자와 여자가 겹겹이 쌓인 시간의 건축같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화자가 된다. 저명한 건축가 아빠를 둔 진(죤 죠)은 별로 좋지 않던 아빠와의 관계를 뒤로 서울에서 번역가로 일한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스물이 넘은 지금까지 콜럼버스에서 사는 여자 카산드라(헤일리 루 리차드슨), 애칭 카시아는 아빠가 바람 나 떠난 후 심적으로 병에 걸린 엄마를 보살피며 그곳에 ‘작은 건축’같은 삶을 산다. 떠나간 남자와 떠나지 않은 여자가 교차한다. 그에 더해 남자 진은 갑작스레 쓰러진 아빠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에 돌아온 참이고, 건축을 빼면 별 게 없는 조용한 동네 콜럼비아에서 카산드라는 진로를 위한 양갈래 길 앞에 고민을 하는 중이다. 돌아온 직후와 떠나려는 망설임의 시간이 가냘프게 스쳐간다. 영화의 초반 우리에게 근대 건축의 핵심을 설명하듯 알려줬던 메시지는 카산드라의 취업을 준비하는 듯한 그 어느 대목의 장면이기도 했다.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떠나고 싶지 않지만 그러고 싶기도 하다. 


비대칭 속의 균형, 

떠나는 인생과 떠나지 않는 시간



하지만 카산드라, 그는 근대 건축, 최소한 동네의 건축에 한해서라면 누구보다 바삭해 몇 차례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적도 있고, 지금도 하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상경을 해 원하는 진로를 걸을 수도 있다. 건축이 아마 지금의 그를 길렀을 것이다. 다만 아빠와의 불화로 일찌감치 고향을 등졌던 진과 달리 여자 카산드라의 삶은 그곳의 건축마냥 보다 머무는 시간 안에 있다. 좀처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오늘 이후 밀려오는 내일과 같은 좀 얄궂은 시간이 발에 치인다. 엄마를 마치 딸처럼 보살피며 카시아는 수도없이 많은 우울을 겪었고, 그건 때로 모든 게 심하게 망가져 삶을 포기하는 찰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어느날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더니 아무렇지 않게 ''가 있었어요'라는 그의 말처럼, 삶이란 곧 늘 그곳에 머무는 시간의 내일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으로서의 지금, 그리고 콜럼비아. 아빠를 잃고 병에 걸린 엄마를 지키며 보낸 나날도 콜롬비아에서이고, 아픔에서 일어나 진로를 고민하고 다시 건축을 산책하던 시간도 모두 그곳, 콜럼버스에서의 날들인 것이다. 이처럼 얄궂은 삶의 시련과 구원이 또 있을까. 여자의 삶 이곳저곳엔 그가 좋아하게 된 그리고 애증하는 콜럼비아, 즉 모더니즘의 건축이 있다. 



‘건축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나요?’

길을 걸으며 카시아는 진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리고 이건 아마 진이 카시아에게 하고싶었던 물음이기도 하다. 진과 카산드라는 우연히 마주친 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아빠를 부정하며 동시에 건축으로부터도 멀어졌던 진에게 마을의 건축을 안내하며 기억과 시간과 마음 속 상처, 오늘과 내가 아닌 너, 그리고 가지 않은 길 사이의 길을 걷는다. 자연스레 1920년대 만들어진 마을의 오랜 길을 산책하고, 엘리엘 사리넨의 시계 탑을 지나 이오 민 베이, 리챠드 마이어 등 근대 건축 거장들의 작품이 그들과 함께 걷는다. 


그러길 며칠 째 작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교량 건축에 앞에 다달았을 때, 둘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건축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나요?’ 대부분 콜럼비아의 건축 이야기만을 할 뿐 각자에 대해 별로 털어놓지 않았던 둘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았고, 어느 상징의 건축 앞에 이르러 조금 더 스스로를 드러내려 한다. 매워지지 않은 둘 사이 거리만큼 충분히 솔직하지는 못해도, 건축이 사람을 치유해준다고, 슬픔을 치료하는 힘을 갖고있다고 자신있게 믿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일어나려는 둘 사이의 믿음을  우린 확인할 수 있다. 진과 카산드라의 산책, 그들이 가던 길을 멈춰 세운 건, 처음으로 건축의 치유를 믿었던 건축가 제임스 폴셱의 1972년 건축 ‘콜럼버스 지역 정신과 병동’이었으니까. 마르케스 가르시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보다 진실한 확신이 리얼하게 그곳에 있다. 



둘을 멈춰 세운 건 정신 건강을 위한 건축을 실제로 도전하고 만들어냈던 ‘클린턴 도서관’으로도 유명한 폴셱의 본격 치유하는 건축이다. 둘의 말은 여기서 시간의 교량이 되어주었을까. 여자는 다시 또 말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건물을 통과하게 되고 반대편 중앙 병동의 표지판이 보여요.’ 교량 건축이 갖는 상징, 물리적 공간을 연결하고 폴셱의 주장대로 건축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치유의 공간이 되어버린 그 치유의 예술. 이곳에서 건축은 이미 시간이 되었고, 그리고 기억이 되어 마을의,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의 오늘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번엔 여자가 아닌 남자가 이야기한다. ‘문자 그대로든 비유로든 교량 역할이 목적이죠.' 

건축의 길을 따라 너를 만나고 시간을 기억하고 나를 다시 마주하는 영화, 그건 문자 그대로든 아니면 비유로든 사람을 닮은 건축. 이런 영화의 목적은 무엇일까.


관계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여자의 혼잣말로 시작하는 영화 ‘콜럼버스'에서 그 혼잣말은 별로 하나가 둘이 되거나 둘이 되었다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식의 여정을 걷지 않는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각자의 진로를 향해 떠날 때 여전히 그곳에 남아 엄마 곁에 머무는 여자 카산드라의 하루는 오래 전 그곳에 태어난 하나의 작은 건축을 보는 것도 같다. 우연히 엿듣게된 진의 전화 통화, 하루라도 빨리 아빠 곁을 떠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와중에 서울에선 마감 독촉에까지 시달리는 이야기가 둘 사이를 조금, 가깝게 만들어주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 둘의 대화는 매번 제자리에서 걸어나오지 못한 채 맴돌고, 비가 오거나 해가 지거나 다시 또 아침 해가 떠오르거나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동요하지만 그 역시 거기까지, 흔들리지만 그 또한 거기까지이다. 이 영화는 타인에 대해 섣불리 알고있다는, 혹은 알려는 듯한 반쪽짜리 선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의 건축이 그렇게 한다.



영화의 초반, 카산드라가 근대 건축에 대해 되뇌기 전, 영화는 이미 엘리엘 사리엘의 건축 ‘미러 하우스'에 와있다. 진의 친구이자 그의 아빠 교수를 따르는 엘리노어가 노교수를 찾아온 장면인데, 정작 교수는 보이지 않고 한참을 찾다 뒤늦게 발견해 인사를 하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는 사이 쿵 소리와 함께 그가 쓰러진다. 온통 유리로 감싸인 건물에서 그들은 함께이지만 만나지 못한다. 같이 있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별 다른 장치 얎이 그저 머물기만 하는 대목인데, 이상한 유예의 시간이 발생해 흘러가고 있다. 

길고 낮게 지어진 육면체 건물의 지붕이 하늘을 수평으로 가르는 그곳에 여자가 찾으러 온 노교수는 그곳에 있지만 어쩌면 없다. 다급하게 남자를 찾는 사이에도 그 건축은 그대로 넓고 고요한 뜰 곁에 머물기만 한다(정확히는 카메라가). 건물의 낮은 지평선과 함께 이어지는 시간 속에 아직 만나지 못한 만남이, 한없이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가장 시작인 이 장면은 고요한 패닝으로, 요동하지 않는 정적인 카메라의  쓰임으로 인상적으로 기록된다. 교수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헤매는 대목에 서두르는 카메라의 호흡은 느껴지지 않고, 평범한 오후 어느 비오는 시간에 건물의 이곳과 저곳이 유려하게 생중계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오직 머물고 쉽게 벗어나지 않음으로 지금이 존재하는 식이다. ‘쿵'하고 교수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을 때에도 여자의 전화를 끊고 달려가는 카메라는 별로 급한 기색이 없었다. 말하자면 삶의 시간과 속도는 그곳의 건축에 지배된달까. 아무리 급박한 상황도 멀리서 보면, 내가 아닌 제3자의 시선에선 무디게 비치는 것처럼, 근대 건축에 들어선 영화가 여기서 시간을 재촉하는 일은 별로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여기엔 오즈의 그것만큼 보는 이의 맘을 조용하게 요동치게 하는 힘이 있다. 창밖에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돌보지 않는 돌봄,

찰스 바렛의 하늘 지붕같은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사리넨의 또 다른 건축 시계 탑 앞에서 외는 카산드라의 모습이다. 영화가 아닌 그보다 먼저 도착한, 혹은 만들어진 생활 속 어느 건축 단위의 프레임은 이곳에서 보다 영화적이고, 삶 가장 지근거리에서 포착한 그 건축 안팎에서의 일들은 지긋이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엘리노어에게 비 내리던 그 수평의 건축이 시작이라면, 카산드라에겐 어쩌면 그보다 더 나중일지 모를, 동시에 더 먼저일지도 모를 이곳이 또 시작이다. 그렇게 단일의 독립적인 건축으로서 마을을 살아온 게 벌써 수 십년이다. 

머물고 싶은 맘. 떠나고 싶은 생각. 머물고 싶지만 떠나야 하고 떠나고 싶지만 머물러야 하는 인생. 카산드라와 진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지만 그건 결코 남을 통해 나를 반추하는 거울같은 게 아니고, 사리넨의 유리의 집과 같이 그곳에 살며 그곳을 잃어가는, 동시에 여전히 잘 모르고 영원히 알 것 같지 않은 다면체의 인생을 바라보는 일에 더 가깝다. 다행이게도, 그리고 불행하게도 도시는 오늘도 아직 그곳에 있다.


카산드라는 진의 조언을 받아 힘겹게 독립을 결정한다. 진은 카산드라와 그의 엄마 사이를 함께 관찰하며 조금 더 그곳에 머물기로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집’에서 벌어지는 일. 각자의 고향이 품고있던 내일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거울에 비친 너가 아닌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건축은 사실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진과 카시아처럼 우린 왜 매번 그곳의 내일만을 찾으려 할까. 여기엔 두 남자와 여자에 상응하는 시간으로 이미 떠나갔거나 곧 떠나갈 대상으로서의 엄마, 그리고 아빠가 존재한다.




모두 70여 점의 근대 건축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그럼에도 인물 진과 카산드라의 일상, 그 삶의 자리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동시에 영화는 각각 엄마와 아빠로 대변되는 away from home, 고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건 좀 이상한, 떠다가과 떠나옴의 주체가 다소 역전된 물리적 고향으로서의 장소가 아닌, 인생의 어느 갈래길과 같이 삶의 무게를 상대하는 좀 더 자기 고해적 상황이 되어있다. 아빠가 갑작스레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에 있지만 오랜 불화로 좀처럼 곁에 있고싶지 않은 진과, 오랜 시간 엄마 곁에 그를 돌보며 살아왔지만 그 때문에 장래 앞에 주춤거리게 된 카산드라. 진은 서울에 살며 콜럼비아가 두렵고, 카산드라는 콜럼비아에만 살며 그곳을 벗어나는 게 두렵다. 둘은 콜럼버스에서의 시간을 엄마와 아빠 곁에서의 날들처럼 살아간다. 어느새 나의 인생이 되어버린 도시, 곧 건축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서 건축은, 그를 넘어 장소는 이미 둘 사람이 사는 곳의 의미를 넘어 삶을 넘어있고, 고요한 수평선을 따라 흐르는 필름 안에 안착, 수렴한다. 이상하리만치 그 전부가 되어있다. 그저 태어나 자라며 마주하게 되는 세상이란 얼마나 나를 벗어나지 않는, 동시에 그 어떤 다른 차원도 매개하지 않는 시간이고 공간일까. 도시를 걷고 건축을 산책하고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유랑하던 영화가 이윽고 사람의 자리에 다가와 멈춰 서는 건 바로 죽음, 그 곁에서였고 그렇게 온전히 나의 것으로서 지금을 받아들이게 한다. 도저히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는 카산드라의 돌봄으로서의 애도와, 조금은 캐쥬얼한 미국식 애도에 기대고 싶어하는 돌보지 않음으로서의 진의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 슬픔은, 도덕적 감수성 면에서 정반대의 애도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건 서로 닮은 그곳의 이른 아침이거나 늦은 새벽녘처럼도 보인다. 어느덧 해질녘을 향하고 있는 도시에 그곳은 곧 엄마, 그리고 아빠 곁에서의 어쩌면 마지막 하루였다.


내 고향이라는, 

그 어느 먼 길



물론 이 이야기가는 표현의 방식과 정도가 다를 뿐 똑같이 슬프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애초 영화는 건축을 인물에, 동시에 시간에 빗대어 바라보지 않는다. 단지 개인의 감정은 그저 가녀리고 가냘퍼 그 하나 만으로는 금새 부서지기 마련, 그 곁에 다가서는 또 다른 유사한 감정의 매개체로서 드러나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비로소 그런 순간에, 말 못한 감정이란 게 새어난다. 

진과 카산드라는 서로를 보완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지만, 각자를 더욱 진이고 카산드라이게 하는 사이가 되어있다. 아는 사이가 친한 사이가 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가는 전개가 아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되는 둘의 관계는 오히려 서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서 지속 가능하다. 즉 둘은 서로에게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하지만 콜럼비아에서, 근대의 상징적인 건축이 가득한 그 거리에서 둘 사이의 감정을 서술해주는 건 이미 마련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좀 더 확대해 말하면 둘의 미래 역시 애지감치 그곳에 그려져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나의 고향이란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 멀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상층 구조가 서로 분리돼 설계된 에드워드 찰스 바렛의 ‘콜롬비아 시청' 건축 앞에서 카산드라는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는 선택을 한다. 진은 머물지 않으면서 머물 수 있는 오늘을 택한다. 서로 만나지 않았어도 아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둘이 만난만큼 그 선택은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찰스 바렛의 건축 아래에서 바라본 하늘, 바로 그런 순간과 같이 고개를 들어 오늘을 추스리고 내일을 다짐하게한다. 멀어진다는 건 곁에 서보는 일이기도 할테니까. 물론 이는 그저 언어 도단일 것 같은 문장이지만, 내가 아닌 너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건 보다 더 진실이 되어있다.

건축의 한쪽 면이 끝나려 할 때 다른 한쪽 면의 건축이 시작한다. 그 사이를 여백이 그려낸 하늘이 연결한다. 이건 기상학적으로도, 아니면 영화적 프레임의 방법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오직 삶이 그를 대신한다. 오랜 건축이 있는 도시를 산다는 건, 그렇게 때로 떠나가는 일일까. 다시 돌아오는 자리에 이제야 떠나가는 너의 시간이 흐른다. 태어나고 자란 자리에서 그렇게 다시 돌아옴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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