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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16. 2023

빠지지  않고  버티기
홍상수와 그 3에 관하여

바다에 방 3개를 차려버린 영화, 시작에만 60분 





그래서, 3일이 걸렸다. 

계획도 없이 정해진 이야기도, 하물며 일말의 시나리오도 쓰지 못한 채 내려온 남쪽 마을 바람 많은 그곳에서, 영화 촬영은 결국 3일째 끝이 났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지만, 동시에 이게 뭐 대수로운 이야기일까 싶은데, 홍상수의 29번째 영화 ‘물 안에서’에서, 이 숫자 3이란 아무리 아니라 밀어내 보려해도 이상하게 거대한 질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난 여기서 이 ‘끝’에 대해,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오던 그 어느 저녁 무렵에 관해 무엇 하나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직 영화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조각이 남은 피자를 정확히 가위로 세 등분 나누어 먹는 것과 같이, 성모와 상국, 그리고 남희까지 등장 인물도 3명이었으니 이는 감히 한 사람당 하루씩, 그저 딱 그만큼이 흘렀을 뿐인 이야기라고 말해 볼 수는 있을 것같다. 

피자와 샌드위치, 회. 세 번의 식사를 함께 나누고, 3일의 아침과 밤이 지나고, 숙소로 마련한 허름한 1층 주택 서로 다른 세 개의 방에 머물며 그곳을 세번 즈음 들어갔다 나오고. 동시에 성모가 영화를 위해 모아놓은 아르바이트비도 300만원, 담벼락 유채꽃과 숙소 앞 작은 개울의 민물고기, 그러고보니 초반에 바다 한복판 둥근 섬에 모여 앉아있던 이름 모를 새 무리까지, 느슨한 상징의 포착마저 숫자 3의 얼개로 움직이는 이 영화에 이름모를 이 제주행은 이상하리만치 3이란 질서 그곳에 마련된 시간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최대한 절제된 영화적 물리적 세계에, 오직 3이란 숫자만이 선명해진다. 


그도 모잘라 러닝타임은 여태 홍상수 영화 중 최단 시간인 61분.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 1분 정도를 감안한다면 난 왜 자꾸 이를 3*20, 혹은 60÷3으로 해체해보고 싶을까. 


물론 이에 대해서도 난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로케이션을 포함 세 번 정도의 현장 아닌 현장 끝에 영화는 비로소 영화를 마치고 그곳에 마련된 그들의 시간, 약 60여 분도 어느새 지나고, 그 모든 것이  fade out 즉 사라질 때, 3이란 질서가 하나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곧 소멸의 길을 향할 때, 영화는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서의 프레임-아웃. 애초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하지 않았던, 즉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텅 비어있음으로의 블랙아웃. 바람, 여자, 돌이 많아 삼다도라 불리는 그 곳에서, 제주를 제주라 말하지 못하며 홍상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아니, 그건 어떤 세계의 만남이었을까. 즉 시작이거나 마지막이었을까. 

우리 모두가 제주라 유추하고 있을 때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서 그곳을 암시하는 건 오직 ‘물 안에서’라는 영화 밖 타이틀 뿐. 어쩌면 정말 이건, 이미 이곳이 아닌, 그 밖의 어느 상태에 도착한 시간의 ‘지금'은 아니었을까. 시작이 시작을 하기도 전에 홍상수의 영화는 이미 좀 심란하다.


숫자 3이라는,

완벽하게 불안한



영화의 스토리란 그야말로 단촐해 위에서 얼추 다 이야기가 됐다. ‘인트로덕션’에서 친구 사이였던 신석호와 하성국이 각각 성모와 상국으로 등장하고, 그들과 동행하는 여자 후배 남희를 이번 영화로 홍상수 작품에 첫 출연하는 김승윤이 맡았다. 홍상수 영화에선 보기 드문 ‘신인 배우’인 셈인데, 그만큼 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거나 잘 모르고, 혹은 이제야 알았거나 이제서도 몰랐다. 찍으려는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모와 아무 이야기도 들을 게 없어 역시나 모르는 상국과 남희. 그들은 함께 마을을 걸으며 촬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로인해 얻어지는 어떤 종류이든 발견, 곧 ‘앎’은 별로 없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 만이 아무렇지 않게 흐른다. 

끝내 그들은 별로 알지 못한 채 촬영을 시작한다. 로케이션 이틀 째 성모가 해변에서 홀로 쓰레기를 줍는 여성을 발견한 뒤 겨우 카메라를 켤 수 있게 되지만, 어찌됐든 성모 본인을 포함 그들은 아직 모르는 상태다. 홍상수 영화의 제목을 빌려보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달리 말해보면, 성호라는 잘 모르는 ‘만들어지지 않은 개체’의 이제야 움직이기 순간, 비로소 시작하는 영화가 그곳에 있다. 시작의 시작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어느 세계의 시점이 이미 그 세계 곧 자체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홍상수 영화속 소위 40대 중년 남성의 고뇌하는 자아가 아닌, 한 세대 아래 미성숙한, 완성되지 않은 남성 자아로서의 시작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가 조금 젊은 세대로 내려온 뒤, 다시 말해 배우 신석호가 홍상수를 대변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처음의, 나아가 직접적이고 가장 날것으로서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신석호가 주연한 또 한 편의 홍상수 영화 ‘인트로덕션’의 그 것보다도 앞서고 날서다. 즉 어느 진입의 바로 그 순간. 이렇게 조심스러운 ‘시작'을 우린 본 적이 있을까. 아니, 그를 체험하게 한다는 건 어떤 영화적 도입이어야만 하나.  홍상수의 길을 따라 말해 볼 수 만 있다면, 시작 이전의 시작, 혹은 시작을 위한 시작.  


https://youtu.be/Bg1t8s_CwyI


영화지 ‘버라이어티’는 아마도 이에 관해 영화를 온통 뿌옇게 처리한 포커싱 아웃은 성호란 개체의 불완전한 세계에의 은유라고 이야기했다.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좀 피상적 해석이다. 일정 이틀 째 성모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나 정말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 300만원 다 쓰는거야’라고 말한다. 거의 똑같은 음절의 이 문장을 시차를 두고 두 번이나 말한다. 좀 어리숙한 어린 시절의 병수나 경수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여기서 성호의 시작은 이전 홍상수 영화 속 남성들의 ‘그 것'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기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메모지에 알 수 없는 도형을 그리는 ‘생활의 발견' 속 경수거나 '그 후'의 새벽부터 고뇌에 빠져 지하도를 걷는 봉완이 아닌 직접 몸으로 움직이고 경험하는 성호의 이 시작은, 보다 새것이고 부끄럼이 없고, 남희의 표현처럼 '됨됨이가 믿을 만한' 것이고,기만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의식에 가득찬 그들의 그것보다 낡지 않았다. 그러니까 경수나 병수의 조금 더 이전 시간으로서의 성호가 아니다. 

오히려 이곳에서의 ‘시작'은 더 근원적인, 어느 마지막을 초월한 자세로서의 시작에 가깝다. 이곳을 뛰어넘은 어느 죽음의 소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시작이 되었거나 끝이 났거나. 홍상수의 긴 여정은 왜 자꾸 시작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걸까. 그리고 그 ‘시작'은 그간 줄곧 찾아온 ‘본질적 세계' 혹은 세계의 본질, 그 자리를 가리키는 걸까. 이곳에 뿌옇게 흐린 하늘은 비를 뿌리지 않았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그의 영화를 보며 난 그 물 안에 잠겨 어쩔 수 없이 이 노래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맥킨리 미첼의 1992년 곡 the end of a rainbow.’  무지개의 끝. 虹の根元. 아니면 시작. 

비가 그치고 하늘에 떠오르는 무지개, 우리는 그 끝을 혹은 시작도 결코 만난 적이 없다. 


I went running to the end of a rainbow / 

Looking for a treasure they said I would find / 

I found nothing but heartaches and troubles / 

I'm about to lose my mind. 


하지 못한 시작,

끝이거나 시작이거나 혹은  인트로덕션



그리고 이쯤 와서, 

제목부터 시작을 암시하는 2021년 ‘인트로덕션’ 부터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만들어진 3편의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와 ‘소설가의 영화’ 그리고 ‘탑’을 지나 이번 ‘물 안에서’에 이르러, 난 조심스레 그의 영화에 떠오르는 하나의 시제를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세상의 중심이 균형을 다시 쓰려할 때, 홍상수가 가장 먼저 완성한 작품 ‘인트로덕션’은 정확하게 제목부터 하나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 네 챕터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그는 각각 서로 다른 ‘인트로덕션’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 중 가장 첫 번째 이야기가 신석호 배우가 영호를 연기한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 그리고 두 번의 다른 ‘시작’을 지나 도달한 나머지 한 번의 ‘시작’이, 이번의 친구 상국이 아닌 성국과 거친 파도 에서 부영켜 안던 장면의 [인트로덕션], 즉 ‘어떤 것의 처음 부분’이었다. 

이전 홍상수의 영화가 주로 어딘가로 떠나거나 근래엔 돌아온 뒤의 발견되는 세상을 탐지해 왔다면, 여기에서 그런 건 생략되어 있고, 최근 홍상수 영화에 아른거리는 건 여지없이 시작, 아직 무엇도 쓰여지지 않은 도입, 혹은 그 직전의 ‘인트로덕션’, 그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의 트릭이 사라진 홍상수 영화에서 남겨진 시간은 오직, 가장 날것의 것을 구한다.


그래서 근래 그의 영화들을 이에 대입해 보면, ‘당신 얼굴 앞에서’의 영옥의 회귀하는 시작은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옴’의 성취였다. ‘탑’과 ‘소설가의 영화’에서 우린 이전 홍상수 영화와 달리 ‘한 사람이 무언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의 순간을 목도해왔다. 동시에 이 두 영화에서 영화 찍는 병수와 길수의 마지막에서야 찾아온 이상한 시작은 이미 다른 차원에서의, 이곳과 다른 세계와 접지한 듯한 시작이기도 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제 시작 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제와 새삼스레 시작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코로나 이후 제시한 모두 네 개의 ‘인트로덕션’, ‘소개, 입문, 서문, (새것의 도입) 등', 어느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 어느 입구를 그는 서성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수와 병수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태어나기는 했으나’ 그 ‘시작'의 자리를 좀처럼 떠나지 못해 같은 자리에 머물며 너비가 아닌 깊이의 차원으로서, 혹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가장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곳에 서서 고민한다. 

말하자면 횡적인 패닝이 사라지고(즉 확장하지 않고), 줌업으로 대변되던 깊이의, 하지만 이번엔 더욱 나아가 프레임 밖 보이지 않는 시작이거나 마지막까지 어떤 기운, 움직임, 혹은 음악이 끝난 뒤에도 남은 잉여의 시간까까지도 포함해 시작의 전이거나 마지막의 이후, 그러니까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시간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이건 영화인가 현실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가.


해변에 허리를 굽히고 고동을 줍던 성호에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남욱이 그를 향해 걸어 화면 안으로 들어설 때, 즉 내레이션 보이스의 주인이 남욱임을 우리가 알게되었을 때 그는 어디로부터 이곳에 도착한 걸까. 영화가 시작을 시작하기도 전, 그곳은 어디였을까. 아마도 가장 심플한, 홍상수 영화의 그 흔한 패닝이나 줍업 하나 작동하지 않는 이 영화에 대해 감히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우린 지금 가장 ‘위험한 영화’를 마주해 버렸(는지 모른)다. 영화는 이상하게 성호, 남국, 남희 이 셋을 다른 이들과, 곧 현실 세계와 심지어 영화의 세계와도 쉽게 관계하게 두려 하지 않는다.


지워진 카메라

남겨진 세계의 오늘



영화는 하나의 진입으로 시작한다. 이는 근래 홍상수 영화에 공통되게 작동하는 시작을 여는 방식이다. 뿌옇게 짙은 안개라도 낀 듯한 바닷가에 성호가 업드려 무언가를, 고동을 줍고있고 그를 바라보던 남국이 ‘좀 잡아와봐’라 말하지만 그에게 다가간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이혜영)가 세원(서영희)의 책방에 도착 문을 열고 ‘진입’한 것처럼, ‘탑’에서 병수(권해요)가 오랜만에 혜옥(이혜영)의 가게, 수상한 4층 건물에 도착한 것과 같이, 또는 ‘당신 얼굴 앞에서’ 카메라는 이미 평범한 한국 중산층 가정의 아파트에 도착해있던 것과도 같이, 하나의 ‘진입’이 영화의 시작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전과 달리 도착 이전 ‘떠남’의 시간이 생략되어 있는데, 여기선 오직 시작의 문을 열기 위한 하나의 인트로가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좀 이상한 건 여기서 카메라는 ‘그냥 거기에 있을 뿐’, 인물을 쫓거나 보이지 않는 다른 시계와 접속을 하려 하지도, 동시에 방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해변에 도착한 카메라 앵글 안에 남국이 화면 너머 성호를 향해 걸어가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음악이 시작되고 둘이 만난 뒤 방향을 틀어 숙소에 돌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한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튼 것 같이 흐르는 선율에 그를 바라보는 우리=관객은 그저 좀 몽롱한 기분을 체험할 뿐이지만, 이미 영화는 해변을 떠나 숙소에 돌아와 있다. 지금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의 ‘시작’인가. 여기엔 인물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의 액션이 존재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컷만이 개입되어 있고, 그도 별 다른 의미를 위한 카메라 워크라기 보다 바다와 숙소,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이분하기 위해 최소한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즉 '아무것도 아닌 컷'인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영화는)‘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히 많은 ‘다른 세계들’의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경험(을 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를 위해 빈번히 활용되던 그 특유의 패닝이나, 근래엔 좀 다른 감각으로 변주되었던 클로즈업과 아웃이 모두 조용히 발자취를 감춘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돼. 프레임아웃되게.'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성호가 남욱에게 촬영을 하며 주문하는 그 말처럼 딱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의 이 남국의 ‘걸어감’, 진입은 별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줌업을 사용하지 않는 카메라 앵글 안에서 화면 속으로의 진입, 즉 수평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을 가로 지르는 말하자면 종단의 움직임은 스크린 내에서 멀어질 뿐이고 끝내 소멸을 말한다. ‘인트로덕션'의 마지막, 마지막 그 직전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소설가의 영화’ 속 영화의 엔딩과 같이. 그렇다면 이건 영화를 끝마친 것일까, 아니면 시작한 것일까. 


홍상수는 근래 영화 속 영화를 만드는 설정의 상황을 반복하며 프레임의 중층 구조, 내부의 깊이를 살피는 설계의 시도를 한다. 영화의 보편적 편집 방식, 시간의 흐름을 쫓거나 뒤틀거나, 수평의 패닝이거나 극단적 클로즈업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고 한다. 달리 말해 영화적 현실 안에 보이지 않던 세계를 찾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점점 더 심플해지지만 결과는 더욱 아리송하다. 특히나 이번 ‘물 안에서'에서, 영화는 프레임을 넘어, 때로는 영화이기를 포기하며 보이지 않는 너머로 퇴장하기까지 한다. 이 맥락에서 ‘물 안에서'의 엔딩(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은 ‘소설가의 영화' 속 그것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 있는지 모른다. 성호는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왜 영화를 만들려 하느냐'는 남욱의 질문에 ‘명예’라고 답했다. 죽음을 암시하는 모티브가 홍상수 영화에 빠졌던 적은 아마도 거의 없지만, 이번엔 성호의 말로서 직접 언급된다. 애초 명예란 과거형의 말, 누군가의 죽음 이후 살아있는 결국 이곳에서 사라진, 혹은 떠나간 시간의 흐릿한 기억밖에 되지 않는 말인 것이다. 

그는 결국 영화 속에서, 영화의 영화 안에서 '너머'로 퇴장을 한다. 이를 영화를 만드는 영화를 보는 관객 시점에서 프레임과 프레임, 세계의 서로 다른 가능성, 혹은 가능성의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시점 밖의 몽타주, 즉 죽었거나 이탈한 세계로의 카메라 워크가 아니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프레임) 너머의 너머를 응시하는, 곧 제자리에 돌아와 펼쳐낸 시간도 공간도 아닌, ‘어떤 모름’으로의 확장이 아니면 또 무엇일 수 있을까. 결코 쉽게 함께일 수 없는 패닝하지 않는 세계에서 수평이 아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광대하고 쓸쓸한 시점숏의 연결 아닌 이 연결은, 굳이 이 영화를 참 외롭게 한다. 

화면이 늘상 뿌옇게 흐려있는 건 너무 멀거나 가까워서. 하지만 또 하나의 숨겨진 이유는, 이미 이곳은 그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바다에 

세 개의 방을 차려버린 영화 



그리고 이 '뿌염'에 대해 홍상수의 영화는 이미 예견되어 왔는지 모른다. 

영화적 장치가 최대한 자리를 감춘 자리에서, 단 세 번의 만남의 시제 만이 흐르던 아마 ‘도망친 여자' 그 후 부터 홍상수의 영화는 오히려 더 몽연한 기분을 남긴다. 비슷한 반복의 모티브나 뒤섞인 시간의 장난같이 현실을 도발하던 영화적 트릭의 형태가 모두 물러간 뒤, 홍상수 영화가 가리키는 건 더욱더 알 수 없는, 수상해진 미스테리의 우물이다. 특히나 4층짜리 상가 주택에서 거의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 즉 같은 공간에서의 영화 ‘탑'에 다달았을 때, 그건 가히 마법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건의 앞뒤가 뒤바뀌어 혹은 먼저 도착했거나 이미 떠나버린 뒤의 상황이 그곳에 기이한 순서로 나열될 때, 영화는 공간도 시간도 아닌 인지된 어느 상황을 그저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홍상수 영화 중 유일한 외국어, 그리고 가장 짧게 지어진 이 영화의 제목은 심지어 곧 그 이야기의 구조처럼도 느껴진다. 당초 오프닝 크레딧에서 영화는 직접 손으로 제목을 쓰며(아마도 홍 감독 본인이) 이를, 자백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지우고 지우고, 작아질 만큼 작아진 뒤 남아있는 단 하나의 글자에 사실 이 영화의 모든 건 다  담겨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물 안에서’, 이 역시 난 영화의 제목이 곧 구조가 되어버린, 즉 영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보다 더 급진적 홍상수의 영화라 말하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물 안에서'란 말의 어디도 아닌 지형학적 불안정성. 영화 리뷰를 쓰며 영화 제목을 언급할 때 ‘~에서’란 조사는 이야기를 설명하며 쉽게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보다 먼저 공개된 ‘당신 얼굴 앞에서’와 지금의 이 두 영화에 그 조사, ‘~에선’는 좀 불길한 느낌을 숨길 수 없다. 말하자면 ‘당신의 얼굴 앞에서'에서 혜옥은, 또는 ‘물 안에서'에서 성호는'과 같은 문장에서 그 ‘에서'가 가리키는 곳이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영화 리뷰에 사용되는 ‘에서'의 용법은 영화 안의 내용을 지칭하지만, 여기엔 그 ‘안'의 의미가 두 번 중첩되어 있고, 이는 다시 말해 프레임 너머의 너머, 보통은 영화를 보는 관객 시점의 현실을 가리키겠지만,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는 너머의 안쪽이 아닌 그 뒤편,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점이 아닌 그 반대의, 불길하게도 영화 속 인물의 시계(視界)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길하게도 아마도 그렇다.



아마도 제주일 것 같은 바람 많은 섬에서 관광을 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찍으러 온 성호와 남국과 남희. 그리고 성호가 영화의 실마리를 발견한 듯한 바닷가 아래 쓰레기를 줍고있던 이름 모를 한 여자. 영화 안에서 그 너머의 프레임은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 함께 또 따로 공존한다. 하지만 서로는 서로를 볼 수는 없고 단 한 사람, 영화를 만드는 성호의 구상 속 남자 만이 쓰레기를 줍던 여자와 대화를 한 뒤 그 사이를 오가며 배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남자는 누구일까. 물론 성호를 대변하는 영화 속 영화의 인물로 생각하는 게 가장 적합하겠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왜 지금 이곳에 와 세계를 셋으로 나누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갈 수 있는 길과 그럴 수 없는 길, 그럼에도 존재하는 비현실 사이를 헤매고 있는 걸까. 

영화의 초반 로케이션 헌팅 차 첫번째 골목에서 남국과 남희가 조금 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할 때 성호는 ‘조금만 조용히 하자'고 주의한다. 아무것도 없는 골목에 오직 새 소리만이 들려오는 곳에, 멀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금방 정적을 깨고 말지만 이들은 바로 다음 장소로 퇴장해버린다. 

그리고 이번엔 해변에서 촬영 장소를 물색하고 돌아가던 길, 음식점이 정말 많은 길을 지나며 이들은 회를 주문해 들고 숙소에 가서 먹자고 합의한다. 이건 또 무슨 대수롭지 않은 의미인가. 바로 다음 장면엔 무언가 하나의 성취에 도달 것처럼 영화 초반 흘렀던 그 묘연한 멜랑꼴리의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왜 꼭 항상 셋이여야만 하는가. 함께 바다에 있으면서 관광객 무리와 성호 남희 남국은 꽤 떨어진 다른 곳에 서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를 바라봤고, 아마도 숙소 주인이 나눠주겠다던 라면에 김치를 받아 먹지 않았다. 오직 그곳에 머무르려는, 관계하지 않음으로서 가장 지금의 나를 살려고 하는 어떤 애처로운 고립된 의지가 이상하게 이 영화엔 묻어있다. 


밤이 더 밝아오는

그 '물 안에서'



골목에서 만난 유채꽃 한 송이와 몇 번의 컷이 지난 뒤 등장한 무리의 유채곷, 영화 초반 바다 위 돌섬에 무리져 앉아있던 이름 모를 새들과 남국의 목소리로 두 번, 각각 돌의 섬과 돌의섬으로 발성되었던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의 환기. 영화의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점에선 의뭉스럽게 보이기만 하는 이 모든 단절된 동시공간은 어쩌면 이미 서로 다른 세계의 앞과 뒤 아니면 둘도 아니거나, 아무튼 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같은 바다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의 3일. 

'선배는 귀신 믿어요? 새벽녘 화장실을 가다 ‘정신좀 차려'라는, 출처 불명의 고성에 놀란 남희가 남국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남국의 ‘믿지는 않지만 봤으면 좋겠어'라는 말.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보면 확실해지잖아’라는 이 이야기는 술자리 어설픈 농담처럼 들릴 뿐이지만, 삼각형의 서로 다른 꼭지점처럼 이야말로 프레임 너머의 세계를 은유하는 '믿을만한' 괴담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어느 한 점의 이동은 나머지 두 점과의 수평을 흔들고 세계는 점점 이곳을 이탈해 퇴장이거나 소멸, 혹은 시작이거나 마지막을 남긴다. 


https://youtu.be/K_Fy6x-5ITo

 또 하나의 '무지개의 끝' 시작을 보거나 마지막을 보거나. 


홍상수의 ‘영화를 만드는 영화’에서, 극 중 인물을 영화 안과 밖의 너와 나로 동일시해가는 그 길가의 영화에서, 세계는 어느새 서로에게 흡수되어 여기거나 저기거나 지금은 맞거나 그 때는 틀리거나, 지금으로부터 자유롭다.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성호와 파도에 휩쓸려 어느새 하나가 되어버린 세계와, 노래도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마저 모두 소비돼 암전과 함께 깜감한 어둠에 잠긴 그 모든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한 죽음 곧 그 후의 시작이기도 하다. 시종일간 뿌옇게 퇴색된 화면에서, 그곳엔 아침이 온 적도 없지만 밤이 찾아온 적도 없었다. 남희가 밤이라 무섭다고 이야기해 알아차릴 뿐 뿌연 시계에 딱히 밤은 어둡지도 않고, 아침이라고 딱히 밝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곳의 밤은 밤으로서 보다 밝아온다. 그래서 성호은 결심은 비장하지만 무력하지 않고, 죽음 바로 곁에 서지만 동시에 아침 바로 그 직전이다. 더이상 '우물에 빠진 돼지'가 아니다.

남희의 ‘정신 좀 차려', 남국의 보이지 않는 귀신과 맞서기 위한 박치기,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 300만원을 모두 투자해 아마 명예로 기억될 성호. 3일 여정은 모두 다 끝이 났고, 계획된 혹은 계획되지 않은 계획은 모두 이루워졌고, 난 어쩌면 처음으로 홍상수의 영화 속 성공을 보았(는지 모른)다. 죽음을 죽기, 삶을 또 살아보기, 그리고 시작을 시작하기. 홍상수가 물 안에서 찾은 나머지 하나의 퍼즐은, 아마도 바로 이 시작의 시작, 모든 소멸과 밤과  어둠 이후 다시 죽음을 향하는 어스름한 새벽녘은 아니었을까. 불길하면서도 신비로운, 아름답게 무서운, 그리고 검게 그을린 저녁 햇살같이. 단 한 조각 남은 피자를 삼등분 정확히 나누어 먹는 건 그곳에 남겨진 고마운 우연 같은 것이라고도 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의 영화’ 속 혜옥은 ‘낮은 금새 저무니 열심히 돌아다니자'고 말했고, 무지개의 시작이거나 끝. 시작과 함께 끝이나는 그 어디에 홍상수의 영화가 잠시 찾아왔다 떠나갔다. ‘물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그런데 아직 먹지 못한 밥 한 끼는,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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