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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02. 2023

내일을 여는 문단속,
이 영화가 열도를 돌며 잠근 것

국민 작가와 스토리가 태어나는 법,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내일을 여는 '문단속', 이 영화가 일본 열도를 돌며 ‘잠근 것' 




잠에서 일어난, 꿈에서 깨어나는 영화는 ‘태곳적 인간의 본성, 직접 도달할 수 없는 고대 정신의 살아있는 기록’이 지나간, 생생한 기억과 같다. 



유명한 철학자의 말도, 훌륭한 책에서 그대로 옮겨 온 문장도 아니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 그 세 번째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아마도 이와 같다. 전에 없이 신화적 세계가 대범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그에 대한 낯선 느낌을  프로이트의 유명한 ‘꿈의 해석'의 어느 문장과 더해보았을 뿐이니 당신이 위의 말을 들어보지 못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건 곧 신카이의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픽션 안에서도 리얼리티가 상당 부분 결여되어 있고,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비약을 서슴치 않는 전개가 꽤나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이미 여러 번 꿈에서 시작하곤 했지만, 이번엔 좀 이상하게 다르다.

신카이의 영화는 무엇보다 감정에 세세한, ‘너의 이름은'의 경우 장면 별로 관객의 감정을 숫자로 예측한 그래프를 그려가며 작업을 했을 정도로 치밀한, 감정의 장인이라 불릴 만큼 정교한 것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일어나 대뜸 땡땡이를 치고 대뜸 에히메 행 크루즈에 오르더니 코베를 돌아 미야기를 찍고, 도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이 로드 무비는 그저 급작스럽기만 하다. 이전 그의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시작을 하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본론의 문’을 열어버린 셈이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를 대신해 길러준 이모의 잔소리도, 친구들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홀로 확신에 차 좀 과한 샛길을 강행하는 어떤 집념의 등굣길. 무엇이 그를, 아니 이 영화를 그렇게 하는가. 영화의 서사적 결함은 대부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그와 비슷한 꿈의 세계, 어느 오랜 기억 속을 헤매기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 현실과 현실이 아닌 ‘이세계’로서 어딘가가 그렇게 함께 보여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신카이 월드의 일본색


신카이는 이번 영화에서 유독 일본의 전통과 일상 속 신화를 다수 인용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재앙으로서의 자연을 다시 소환한다. 전과 다르게 가공의 재난을 빌리지 않고 문 하나 사이로 공존하는 현실 속의 그 ‘과거'를 불러낸다. 다시 말하면 픽션 안에서 리얼리티로서의 현실을 살고있다. 도쿄에 이르러 스즈메의 오래된 일기 속엔 (아마도 2011년)3월 11이란 날짜가 또렷이 적혀있었고, 스즈메란 이름은 일본의 신화를 기록한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아마우즈메(天宇受売命)서 비롯되었다고 추측된다. 아마우즈메, 곧 강한 여성이란 뜻. 때로는 너무 현실적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의 비현실성.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스즈메, 그는 이해할 수 없어도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턱없이 부족해도, 강하고 또 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고 도시락을 잊지 않고 챙기는 소녀의 지극히 보편적 오늘의 현실이 아닌, 그 맞은편 오래 전에 기억된 그리고 지속되는 어떤 운명같은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아마 가장 신카이 답지 않은 작품이다. ‘초속 5센티미터'로 대표되듯, ‘별을 쫓는 아이들'부터 시작된 이상 세계에의 로망, 여기가 아닌 저기로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낙원과 같은 세상이 이미 산산조각 찢겨가고 있다. 신카이 영화에 늘 드리우는 아가르타(Agartha)적 세계, 꿈처럼 아름다운 세계는 이번 영화에서 재앙과 재난이란 현실의 뒷모습이다. 영화의 후반 스즈메가 오래 전 엄마와 살았던 미야기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쿠키 상자엔 영어로 Agartha라 적혀있었다. 이는 가장 처음 ‘별의 목소리'에서 머나먼 우주의 혜성 이름으로 등장했고,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던 해 제작된 ‘별을 쫓는 아이'에선 아내를 잃은 남자 모리사기가 찾던 지하 세계의 이름이었다. 


오타쿠 미학의 졸업과 

보편적 내일의 문을 열다


하지만 그 아가르타의 메시지, 혹은 그를 대하는 영화의 태도는 이번 영화에선 미묘하게 달라져있다. 우주와 미래와 이세계, 아주 먼 꿈과 같은 곳을 상징하는 이 아가르타는 동화 작가 오코츠코 요시코의 ‘피라미드 모자여, 사요나라'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애초 지상 낙원과 사자(死者)의 세계, 양면의 얼굴을 한 그 문 너머의 세계는 조금 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있다. 그건 스즈메의 잊고있던 과거를 열어주는, 깨어주는 보이지 않는 ‘열쇠’가 되어주지만, 분명 ‘다녀올게'가 아닌 ‘다녀왔습니다’를 완성하는 기억임에 틀림없다. 엄마를 찾으러 문 너머로 가려하는 스즈케에게 소타는 몇 번이나 ‘그곳엔 갈 수 없다’고, 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스즈메는 포기하지 않지만, 여기서 그건 이미 갈 수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꿈과 같이 아름다운 세계, 보이지 않는 그 너머와의 싸움을 그만하자고, 신카이는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의 이름은'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했던 대사 ‘너를 만났다’君に会えた가 ‘너를 만났다’, 그리고 ‘너를 만났는데도君に会えたのに'로 변주, 반복되는 것처럼, 살고싶다고, 그럼에도 오래 더 살고싶다고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스즈메의 문단속', 여기서 영화는 무엇을 잠그는가. 소타가 물려받은 열쇠, 주문과 함께 거행되는 재앙을 봉쇄하는 행위는, 그 장소의 기억을 소환하고 달래고 ‘돌려드림'을 통해 이뤄진다.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 망각되는 날들에 대한 추모와 위로, 곧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주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매번 애매한 플래시백으로 스쳐가는 그 절차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필요한 건 보다 구체적인 것, 형태를 지닌 보이는 것으로서의 시간이다. 스즈메의 엄마가 죽고부터 12년. 재앙이 있고 살아가기를 또 십 수년. 영화는 현실이기 위해 기억한다. 판타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는 땀 흘리며 분투하는 오늘을 살아간다. 문 너머 아름답게만 빛나는 사자의 세계와 잠시 이별을 한다. 신카이는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반창고같은 작품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일시적인 휴식과 안도의 시간이자 장으로서 이 문단속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실패한 아가르타로서, 가지 못한 그곳으로서 반창고는 그만큼 유효하다. 결코 이상적이지는 못하지만 그런 게 곧 공통의 아픔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별을 쫓던 그 아이는 지금 문을 닫는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그는 분명 달라졌다. 그가 그린 재해 3부작 그 3편은 이전 자신의 영화들을 한 뼘 더 끌어내며 동시에 반성하거나 부정하며 좀 다른 차원의 영화적 실천을 하려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 가장 많이 제기된 미야카지 하야오의 영향이 느껴진다는 말. 극 중 ‘귀를 기울이면'이란 작품명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하고, 일본의 각종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을 재앙의 원흉이기도 한 미미즈의 시각적 연출, 나아가 소타와의 결투 장면은 ‘모노노케 히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에 더해 등교 중 갑작스레 소타와의 모험을 시작하는 스즈메는 그의 보호자 이모 입장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행방 불명 상태이기도 하다. 


하나의 마지막 그리고 시작 

'문'의 현실적 상징성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단순히 스토리의 전개나 몇몇 모티브의 유사성을 관찰하는 것보다, 일본 사회와의 맥락에서 보다 더 의미를 갖는다. 2016년 ‘너의 이름은'부터 ‘날씨의 아이',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이 재난 영화 3부작으로 불리고 있지만, 2011년 ‘별을 쫓는 아이'부터, 혹은 그 전부터 신카이의 일상 속 비현실로서의 재난을 비유적으로 탐색하는 영화는 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첫 번째 장편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은 남과 북으로 나뉜 일본의 폐허가 된 시대를 배경으로 했고, ‘초속 5센티미터’도 기적이 일어난 그 나머지 반대편은 깜깜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이런 여정이 하야오가 재난을 살아온 궤적과 비슷하게 일치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츠나미, ‘벼랑 위의 포뇨'의 태풍과 츠나미, 관동 대지진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바람이 불고' 등, 국민 감독으로서 미야자키가 살아온 영화적 세월이란 공통의 아픔을 기억하고, 나아가 위로하는 시간과 정확히 포개진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자연 재난과 같은 일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를 신카이 마코토의 새 영화가 이어간다. 다소 내성적이던 태도와 자세의 영화에서 그의 이번 영화는 부쩍 앞으로 한 걸음 전진했고, 기적같은 우연의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스즈메의 내일은 그간 그에게 지적되어왔던 이상적 여성에 대한 유아적 동경, 오타쿠니즘을 벗어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이번 영화에 여성에 대한 페티즘을 느끼게 하는 장면은 거의 자리를 감췄다. 스즈메의 스커트는 별로 짧지도 않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초속 5센티미터'의 영원과 마음과 영혼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키스의 순간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을 경험, ‘다시 쓰기’가 불가능한 거대한 행복의 피크였다. 하지만 동시에 저주가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답기만 한 환상이 아닌 지독히도 현실적인 땅에서의 영화 만들기. 이번 영화에 들어 유독 하늘이 아닌 지면에 발을 딛고 수평 이동을 하는 장면을 보며, 폐허와 아픔과 상처를 공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다음 일본 세대의 국민 애니메이션을 기다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번엔 정말 은퇴작일지 몰라'일 것 같은, '너희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 첫 주 145만을 기록, 제법 묵직한 물음을 남기고 떠나려 한다.


'NO선전'을 선언하며 포스터 한 장으로 개봉한 미야자키 옹의 영화를 둘러싸고는 주제가를 부른 요네즈 켄시와 트위터상 모르스 부호 대화가 화제되었는데, 이미 2020년 신곡 발표하

https://youtu.be/euJWYq9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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