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렇게 가끔 기적이다.
#01 우연히 찾은 블루. 이 날씨에 하필이면 가장 추울 코트를 입고 나와, 1호선 지하철엔 난방이 켜있지 않았다. 이번 마감을 하며 가장 먼, 무려 2시간 반이나 걸리는 동네까지 가기위해 아침 일찍 나왔으나 이미 점심 한복판.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험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는 블루. 지난 여름 도쿄에서 만났던 카와사키 쇼헤이의 트위터를 보다 무의식에 저장 버튼을 눌렀다. 이 색깔은 전자 공학의 이름도 모를 물질을 갖고 진행한 실험에서 한 연구원 학생이 배합을 실수해 벌어진 일이고, 블루 역사상 200년 만의 뉴 컬러. 세상은 이렇게 가끔 기적이다. 서울의 지금을 이야기하겠다고 시작한 일은 고작 한 줌도 되지 않는 나를 알게된 또 한 번의 밤이고, 그래도 흘러간 어제의 도움인지, 별 거 아닌 혼자의 감각인지, 지금까지 실패가 비교적 적다. 카페도, 책방도, 셀렉숍도 이제는 뭐가 또 새로울까 싶지만, 해방촌 언덕에서 책방이 아닌 '서점'이란 말의 온도를 알았고, 장안동 그 목욕탕의 오늘은 어수선한 지금과 내겐 전혀 다르다. 밀도의 서울, 그건 너와 나의 우연이거나 실패. 콘반의 카츠카레는 지난 밤 라디오 속 스다의 카츠카레를 떠올리게 했다.
#02 마르니의 포터와의 14번째 콜라보. 실용 찾는 포터 특징상 마르니의 도도함은 다소 바래지만, 나도 신주쿠 이세탄을 돌며 그 콜라보 가방을 두 개 샀던 기억이 있다. 그건 아마 마르니를 구매하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고, 마르니 특유의 컬리 블로킹과 포터 오리지널 소재의 단정함은 아마도 가장 무난하다. 토트백을 샀지만 뒷면엔 백팩으로 맬 수 있는 스트랩이 붙어있고, 솔직히 이건 꽤나 거슬리는 장식이지만, 14번이란 숫자에 갖게되는 유치한 믿음같은 게 있다. 지난 가을 도쿄에서 만난, 헌옷으로 새옷 만드는 히오키 타카야는 "옷은 사는 것 뿐 아니라 '이렇게 입을 수 있다'에서 느껴지는 기쁨이 가장 크다"고 했는데, 스타일링이란 말엔 어쩌면 별 거 아닌 삶을 이래저래 잘 꾸려가려는 애뜻함이 있다. 오늘도 그 사람은 답이 아직 없고, 고작 며칠 남지 않은 인터뷰는 아직 장소도 미정이지만, 카페에 가는 길 몽블랑이 없어 가또 쇼콜라 한 조각을 샀다. 이곳을 잊고 싶어 잠시 딴 생각을 한다.
#03 9일을 망치고도 마지막 10째는 잘 하고 싶다는데, 일어나라는 엄마의 말도 몇 번 무시하며 뒤척이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떴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키즈 리턴'의 엔딩. 많이도 얘기하고, 너무나 유명하고, 달랑 5분으로 잘라낸 화면엔 예전만큼의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왜 하필 그 영상이 오늘 아침 나타났다. "우리 이제 끝난걸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댓글엔 누군가 엔드롤이 파란색 글자인 것도 감동이라 적었고, 팬톤이 올해의 컬러로 꼽은 건 '클래식 블루'이고,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나는 카와사키 쇼헤이의 트위터를 보다 우연히 찾았다는, 어느 연구생의 실수로 발견했다는 파랑 역사 200년만의 뉴 블루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렇게나 속으면서 매번 속았으면서, 새해가 뭐라고. 내년에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건 그저 일상 깊숙이 침투한 유튜브 시대의 알림일까. 어쨌든 묘한 설렘. 카토리 싱고는 첫 솔로 앨범을 내며 타이틀을 20200101이라 지었고, 이걸 일본어로 읽으면 ニワニワワイワイ, 으쌰으쌰영차영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