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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16. 2017

아무도 모른다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살이 내비친다

발꿈치를 들어 창을 내다본다. 화사한 햇빛이 발 밑에 그림자를 내민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조심스레 발꿈치를 다시 내려놓는다. 이집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엄마 케이코(유)는 이사를 한 첫 날 '이 집의 룰'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일러준다. 하나, 큰 소리를 내지 않기. 둘, 밖에 나가지 않기. 그러니까 인기척을 내지 않기. 애가 넷이나 딸린 편모 가정이란 게 알려지면 내쫓길까 겁이 나서다. 케이코는 시게루(기무라 히에이)와 유키(시미즈 모모코)를 무려 수트케이스 안에 넣어 이사를 했다. 아빠는 장기 출장중이라고 거짓말하고, 자식은 큰 아들 아키라(야기라 유야)뿐이라며 이웃을 속인다. 아빠는 다 다르고, 출생 신고는 되지 않았으며, 수트케이스에 실려 이사를 다니는 아이들. 이들은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엄마 없이 집에 남겨진 아이들의 힘겨운 나날을 그린다. 백화점에 다니며 아이들을 돌봤던 케이코는 새 애인을 만나 집을 나가고, 2DK 좁은 집에는 아키라, 쿄코(키타무라 아유), 시게루, 유키 아이들 넷만이 남는다. 비참한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던 엄마는 깜깜 무소식이다. 수도, 가스, 전기가 끊기고, 아이들은 공원에서 물을 받아 먹으며 간신히 생활한다. 아키라는 시게루와 유키의 아빠를 만나 부탁해 돈을 받고 애를 써보지만, 아직은 어리기만 한 이들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다. 굳게 닫힌 문, 텅 빈 복도를 비추는 카메라가 이 세상에 이 아이들이 없는 것만 같다는 환시를 느끼게 한다. 아키라, 쿄코, 시게루, 유키는 무관심이라는 벽 안에 갇혔다.  


엄마 케이코는 아키라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며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랑 다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아키라가 "언제"냐고 묻자 "아마도"라고 답한다.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유키는 "엄마 언제 돌아오냐"고 오빠 아키라에게 묻는다. 아키라는 "아마도 안 돌아올 거"라고 말한다. 두 번의 '아마도'. 처음의 '아마도'는 '그렇지 않다'가 되고, 두번째 '아마도'는 '그렇다'가 된다. 엄마의 새 애인과 함께 살 날은 오지 않았고 오겠다던 엄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착실히 하며 잘 살아간다. 아키라는 장을 봐 동생들을 먹이고, 쿄코는 세탁을 담당하며, 시게루는 찰흙 놀이를 하고, 유키는 토끼 인형과 논다. 괴롭고 힘든 환경임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나름 즐겁게 산다. 2DK의 방 하나가 아이들의 작은 세계로 완벽하게 짜여진다.


기다리던 엄마는 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기다림은 지난하게 이어진다. 집 안엔 쓰레기가 나뒹굴고 자연스레 악취가 풍긴다. 기다림은 체념을 이기지 못한다. 끝내 아키라는 신발장에서 동생들의 신발을 하나 둘 꺼내든다. 집의 룰을 깨고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작은 해방과 설레임의 순간이 다. 아이들은 뛰기 시작한다. 좁디 좁은 방에서 벗어나 크게 기지개를 켠다.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잡초를 뽑으며 웃는다. 그리고 이들은 씨앗을 뽑아 집으로 돌아온다. 빈 컵라면 용기에 흙을 담고 씨를 심는다. 아프고 힘들지만 내일을 사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관심의 벽을 넘지 못한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묵직한 슬픔을 던진다. 의자에 올라 선반의 물건을 집으려 했던 유키가 떨어지고 이내 목숨을 잃는다. 조심스레 들어 올렸던 발꿈치가 슬프게 추락한다. 아키라는 유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유키가 좋아하는 아폴로 쵸코를 잔뜩 사 하네다 공항으로 향한다. 평소 동경했던 비행기 구경을 시켜주기 위함이다. 수트케이스에 유키의 시체를 넣은 채 모노레일을 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또 한번의 이사. 아키라는 눈물 한 방을 떨구지 않고 수트 케이스 위로 묵묵히 흙을 퍼붓는다. 울지도 않는 아키라를 바라보며 무관심이라는 죄책감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다 자식을 유기한 한 여자만의 잘못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사회를 탓하진 않는다. 다만 아이의 시점에서, 아이들의 생활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며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한밤중에 하늘에게 물어봐도 별들만 반짝일 뿐, 마음에서 흘러나온 물이 검은 호수로 흘러갈 뿐, 다시 한 번 천사는 나를 돌아볼까, 내 마음에서 물놀이를 할까" 집으로 향하는 모노레일 위로 노래가 흐른다. 어쩌면 무의식이, 무관심이 더 위험한 거일 수 있다. 곤란에 처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민 건 팔다 남은 삼각김밥을 건네 준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카세 료)이 유일했다.


우연히도 세월호 3주기 하루 전에 이 영화를 봤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않느냐는 소리가 적지 않다. 잊으려는, 잊자고 하자는 목소리다. 하지만 상처를, 아픔을 치유하는 건 기억과 공감이다.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 중 한 분이 노란색 리본을 단 사람을 보면 "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공감을 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걸 봤다. 작고 작은 행동 하나가 세상 건너 편 어느 곳에서 작지 않은 꽃을 피운다. 무관심, 무의식 중의 망각이 상처를 덧나게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을 해야한다.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세 아이들은 유키를 잃고 나서도 어김없이 동전을 줍고 물을 긷는다. 세상이 아무리 모른척 해도 씨를 뿌리고 화분에 물을 준다. 이제 필요한 건 관심과 공감이다. 우리는 세월호 사고를,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의 처지를 모르지 않는다. 작은 노란 리본을 하나 다는 일, 팔다 남은 삼각김밥을 건네는 일 정도면 된다. 두 눈을 감고 무관심하게 살다보면 세상은 어두워지니까.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살이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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