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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12. 2017

들리지 않지만 들린다

목소리의 형태. 그것은 너와 나의 관계, 그 사이의 모양이었다

목소리의 형태. 혹 하는 제목이다. 몇 번이나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에 어떻게 형태가 있을까 싶어 이번엔 제목을 덩어리로 쪼개 말해 보았다. 목소리의 / 형태, 목소리의 / 형태. 몽롱한 이미지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의미가 다가오지 않았다. 소리만이 공중을 부유했다. 사람을 홀리는 제목이다. 이 답답하고 개운치 않은 느낌이 조금은 해소된 건 영화의 오프닝을 보고 나서였다. 적막이 가득한 흑의 세계 정 가운데에 작은 빛 하나가 숨을 쉬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 빛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a point of light'라는 구절. 빛의 한 점이라는 뜻. 영화의 의도가 어슴푸레 짐작됐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지 않는 것을 잡아 보려는, 어떻게든 형태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빛과 소리가 아닌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로 보고 들어야 할 빛과 소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야마다 나오코의 영화 <목소리의 형태> 얘기다.  


이시다 쇼야(이리노 미유)는 매일같이 달력에 X자를 표시한다. 마치 무언가의 D데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매일을 그렇게 지워가며 살아간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 가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고, 은행에 찾아가 가진 돈을 모두 다 찾는다. 내일이 없는 것만 같다. 그는 자살을 할 작정이다. 찾은 돈을 엄마 곁에 고이 두고 강으로 가 다리 위에 선다. 화사한 컬러의 세상이 초반부터 무거운 죽음을 얘기하는 건가 싶어 뜨끔했다. 하지만 이시다가 뛰어내리려는 순간 영화는 시간을 돌린다. 그리고는 이시다가 왜 달력에 X자를 표시하게 됐는지, 그가 왜 강에 몸을 던지려 했는지를 곱고 섬세한 결로 그린다. 우리는 초등학교라는 세계로, 어린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부드럽게 입장하게 된다. 말을 못하는 전학생 니시야마 쇼코(하야미 사오리), 쇼코를 놀리고 흉보는 이시다, 이시다의 유일한 친구인 나카츠카(오노 켄쇼)와 이시다만큼 쇼코를 못살게 구는 우에노(카네코 유우키) 등. 너무 연약해서 바스라질 것만 같은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숨을 쉬며 나아간다.


쇼코는 괴롭힘을 당한다. <러브 액츄얼리>의 마크처럼 노트를 들고 자기 소개를 한 것까진 좋았으나 친구들은 이내 쇼코를 귀찮아한다. 그 중 괴롭힘에 앞장을 서는 게 이시다다. 이시다는 쇼코의 노트를 연못에 던져 버리고, 보청기를 꺼내 징그럽다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다. 결국 쇼코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그 이후 이시다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친구들이 이번엔 이시다를 왕따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죄가 죄가 되어 돌아왔다.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 때 이시다는 홀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고, 모두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그는 혼자 계단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얘기할 상대가 그 어디에도 없다. 세상이 X표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돼 버린 이시다의 처지를 친구들 얼굴에 X자를 치며 표현한다. 말도, 소리도 통하지 않는 적막의 세계가 이시다의 삶을 점령한다. 이시다는 한 순간에 외톨이가 되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쌓아놓았던 세계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빛과 그림에 유독 공을 들인다. 들을 수 없는 소녀의 입장에서 화면을 구상한 티가 영화 곳곳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소리를 대신할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나 <목소리의 형태>에서 카메라는 인물들의 다리를 자주 잡는다. 이는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이시다의 시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입이 아닌 다른 부위로도 말할 수 있다고, 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시다의 '놀이 공원에 놀러가자'는 말에 발을 동동거리는 쇼코의 장면이 특히 그러하다. 쇼코가 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영화는 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쇼코가 떼어 준 식빵 부스러기를 받아 먹는 잉어의 '뻐끔' 소리, 후라이팬 위의 계란 후라이가 내는 '치지직' 소리, 그리고 빗방울이 쇼코의 여동생 유즈루(유우키 아오이)의 우비를 두드리는 소리.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쇼코의 귀가 되어 소리를 들어보게 된다.


이시다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자신의 지난 날을 생각한다. 스스로를 쓰레기같은 인간이라고, 살아선 안되는 인간이라고 자학한다. 되돌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차게 내리던 비는 그쳤다. 이시다는 쇼코를 찾아가 수화로 사과를 한다. 말로도, 소리로도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으로 전한다. 소리를 느낀다. 세상을 가득 채웠던 X자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따돌림이 따돌림으로 돌아왔듯 이시다는 쇼코에게 전한 사과를 자신에게도 전한다. 자신의 못난 부분까지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도닥인다. 찢겨진 달력의 나머지 날들을 테이프로 이어 붙인다. 영화는 이렇게 다치고, 아프며 자라나는 아이들의 우정을 얘기한다. 여리고 약한 세계에서 따돌림이라는 가시에 찔려가며 커가는 아이들의 세계를 그려낸다. 친구를 미워한 마음은 곧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친구의 목소리만 듣지 못했던 게 아니라 내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의 형태. 그것은 너와 나의 관계, 그 사이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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