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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25. 2017

직진하는 용기, '우드잡'

힘을 뺀 유머와 허허실실, 때로는 이런 게 삶을 살아가는 물과 빛이 된다

어제의 실패를 밀어내 줄 아침이 있을까. 과거의 좌절과 아픔을 위로해줄 내일이 찾아올까. 답을 하기가 주저된다. 그렇다고 하기에 망설이게 된다. 실패와 좌절, 아픔과 고통은 아침 해가 뜬다고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아플 수 있고, 아침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밝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아침이 다 상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영화 <우드 잡>에서라면 말이 달라진다. 낙관이 아침을 깨우고, 웃음이 빛을 부른다. 친구들과 달리 취업에 실패해 얼굴에 그늘 한가득을 드리운 유키(소메타니 쇼타).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광고 전단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본다. ‘산림 연수생 모집’이란 공고 문구. 유키는 내용은 보지도 않고 광고 속 여자 모델에 반하게 되고, 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작은 산촌 마을로 내려간다. 도쿄와 산촌, 미래가 없는 청년과 나무의 미래를 기르는 일. 영화는 당장 내일도 바라보기 버거웠던 청년이 백 년, 이백 년 뒤를 바라봐야 하는 일을 배우며 커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무가 자라며 유키도 자란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코미디 연출이 탁월하다. 과장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으며, 일상의 작고 소소한 구석에서 길어낸 웃음은 적재적소에 배치된다. 이번 영화 역시 그 특유의 웃음이 발휘된다. 먼저 홀로 취업에 실패해 밤거리를 방황하는 신. 유키가 예쁜 여자 모델의 산림 연수생 모집 광고를 발견한 순간 밤은 이내 아침이 된다. 컷 하나 바뀌지 않고 해가 뜬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도망을 치려다 다시 기어들어가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에도 유머는 발휘된다. 등짝이 침대에 닿으려 할 때 방송이 들려온다. ‘오하요고자이마스(좋은 아침입니다)’. 유키는 폴더 전화기가 펴지 듯 일어난다. 웃음이 유키를, 유키의 미래를 구해낸다. 그리고 이 어이 없는 웃음,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유머는 나아가 영화를 끌고가는 에너지가 된다. 어깨에 힘 주지 않고 허허실실 털어내는 유머가 보이지 않던 미래를 열어젖힌다. 어둠과 좌절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렇게 심각해 할 거 없다'고, '사는 거 별 거 아니'라고 격려하는 것만 같다. 그 어떤 위로보다 큰 웃음이다.


로드킬 당한 사슴, 길에서 오줌을 보는 노인, 그리고 나란히 모여 앉아 마작을 두는 할머니들. 유키가 도착한 산골마을 가무사리는 유키에게 미지의 세계다. 삶의 흐름이, 시간의 결이 다르게 흐른다. "농업은 재배한 채소를 그 해 먹으며 결실을 맛보지만 임업은 후대를, 후대의 후대를 바라보며 하는 일이다." 마을 회장 격의 나카무라(미츠이시 켄)의 말처럼 <우드 잡>은 도심의 현대 생활과는 다른 세상,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삶을 보여준다. 내일을 위한 계단으로서의 오늘, 어제를 받춰주는 지지대로서의 지금을 얘기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진중한 태도와 엄숙한 성찰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기에 앞서 합장을 한 채 기도를 하고, 무려 200여년 만의 마쯔리를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치뤄낸다. 하나씩 늘어가는 나이테와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유키. 유머가 열어젖힌 아침, 그 하루의 햇살이 모여 미래가 된다.


<우드 잡>은 임업에 관한 영화지만 나는 그보다 유키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목표도, 희망도, 열정도, 의지도,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이 사는 유키는 그저 낙오한 취업 준비생이거나 실패한 젊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호기심과 적응력에서 희망을 봤다. 결심이나 각오같은 거창함 없이 그저 굴러가는 대로, 감정이 향하는 대로 직진하는 행동에서 죽지 않는 생기를 봤다. 여자 친구와 헤어져 침울해 있던 순간에도 그는 "세상에 유코보다 좋은 여자 널렸어"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크게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불렀고, "너 같은 사람 어차피 도쿄로 돌아갈 거잖아. 그럴 거면 당장 돌아가"라는 나오코(문제의 그 광고 속 여자, 나가사와 마사미)의 질책에는 도망가려던 발을 돌려 보란듯이 임업 자격증을 따냈다. 결심이나 각오는 실패하면 후유증이 클 수 있다. 하지만 결심과 각오로 가두지 않은 마음은 실패해도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힘을 뺀 유머와 허허실실. 영화는 어쩌면 때로는 이런 게 세상을 살아가 물과 빛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키의 웃는 얼굴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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