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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17. 2017

일본을 용서하다

사람에 다치고 사람에 위로받았던 하루. 그러니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이 없어졌다. 한 번만 빼 먹어도 큰일 나는 약이다. 짐을 정리하며 따로 빼놓았는데 그것만 쏙 없어졌다. 심장이 뛰었다.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기침이 잦아질까 겁이 났고, 얼굴에 뭐가 날까 두려웠다. 호텔 로비에 내려가 약을 보지 못했냐고 물었다. 깔끔한 유니폼을 말끔하게 빼입은 여직원이 청소 직원에게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이 나를 미치게 했다. 가슴이 떨려왔다. 맑았던 마음에 먹그룸이 드리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일단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나는 찜찜한 마음을 추스리며 밖으로 나왔다. 닌교쵸 일대를 돌며 취재를 해야하는 날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호텔 로비로 갔다. 사라진 약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절망같은 답이 돌아왔다. "청소하는 사람에게 확인했는데 이것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거밖에', 그건 속이 텅 빈 약 봉투였다. 나는 따져 물었다. 약 봉투는 있고 약은 없는 거면, 약을 버린 게 아니냐고. 직원은 다시 한 번 친절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그 망할 놈의 친절 어법에 더 화가 났다. 그 때 웬 뚱보 남자 직원이 나타났다. 그는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로 여직원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는 청소 직원과 만나게 해달라고 얘기했고 그 뚱보 직원은 이미 확인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십 여분 설전을 벌였다. 책임 지라는 나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호텔 직원. 손님의 물건을 잃어버려놓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에 열분이 터졌다. 융통성 없고 고리타분하며 진절머리 나도록 깍듯한 일본인 전체가 미워졌다. 나는 다음 날분 숙박을 취소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신주쿠 카부키초에 있는 프리미어 호텔 캐빈(Premier Hotel Cabin). 이제 그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  


비가 올듯 말듯 한 날씨였다. 우산이 없었지만 살 필욘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흩뿌리는 안개비를 헤치며 택시가 이와모토와 아키하바라를 지나쳤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됐다.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았다. 우산으론 역부족하다. 비가 세차기도 하고 나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 결국 우비를 사기로 했다. 50엔 짜리 동전만한 비를 맞으며 편의점에 들어가 500엔짜리 우비를 하나 사 걸쳤다. 맛있다고 소문난 오야코동 집 타마히데 앞에서 한 컷을 찍는데 빗줄기가 거침없이 우비 안으로 들이쳤다. 입으나 마나 한 꼴이 되었다. 계획을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눈 앞에 보이는 커피 숍에 들어갔다. 비에 젖은 우비를 벗고 옷에 묻은 비를 털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뜻한 온기가 내 몸을 녹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날씨가 이래서는 찍어야 하는 사진을 하나도 못 찍을 게 뻔했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메모해 놓은 이정표를 확인했다. 키요스미시라카와. 예쁜 카페가 많다는 이곳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다시 우비를 입었다.


비 오는 날에 택시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정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앞을 가렸다. 다행히도 초록색 택시를 하나 잡아 탔다. "키요스미시라카와까지 가주세요." 비는 와도 길은 막히지 않았다. 택시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이텐구 쪽으로 달려갔다. 창에 떨어진 빗방울이 묘하게 아련한 그림을 만들었다. 택시가 스미다 강을 건너 키요스미시라카와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운전을 하던 기사 아저씨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우산 없으세요?" 나는 허탈 웃음을 지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아저씨는 운전대 아래 서랍을 여시더니 남색 작은 접이식 우산을 하나 꺼내셨다. "이거 쓰시고 가세요. 가지셔도 돼요." 나는 너무나 고마워 어이가 없었다. 우비가 무용지물이 되기 일보 직전에 공짜 우산이라니. 그리고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지라니.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여러차례 말 한뒤 한참을 생각했다. 울화통을 터뜨리며 호텔을 등뒤로 했던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다섯 시간 전 그렇게나 미웠던 깍듯한 친절함이 고마운 그림 위에 드리웠다. 오늘 아침 나는 왜 그렇게 화를 냈던가. 왜 그 직원 한 사람의 태도가 일본의 못난 얼굴처럼 보였던가. 그리고 지금 난 왜 이렇게 고마움에 미소를 짓나. 아침의 친절함은 왜 밉고 오후의 친절함은 왜 좋은가. 사람에 다치고 사람에 위로받았던 하루. 그러니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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