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NORESQ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Aug 17. 2020

길 잃은 패션이,
지금 어디에 있냐고 한다면

쓸모없다는 건 가장 쓸모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셔츠를 딱 한 번 입었다. 몇 해 전 도쿄에서 지드래곤이 입었다는 말에 무리해 구입한 생로랑 찢어진 청바지는, 내가 그가 아니여서도 하지만 옷장에 쳐박힌 채 올해는 빛도 보지 못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내게 들이닥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그건 두 달 연속 0원을 찍었던 교통비라기보다, 입지 못한 옷들의 시작하지 못한 계절이다. 꺼내지 못한 갸르송의 재킷과 함께 봄이 지나갔고, 세탁소 비닐을 벗길 겨를도 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어느새 8월, 비를 맞다보니 그 여름은 어느새 반쪽만이 남아있다. 신형 OO란 게 그야말로 모르는 것 투성이라, 일상이란 게 살아도 살아도 알 수가 없어, 오늘도 나는 나의 하루를 시작도 못한 채 떠나보내고 만다. 외출도 하지 못하는 시절, 나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집옷이 늘어만간다.



지난 해 5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의 모임 CFDA는 일종의 성명을 발표했다. 톰 포드가 회장인 이 단체는 The Fashion Industry's Reset이란 이름으로 앞으로의 패션, 코로나가 멈춰버린 옷장의 내일을 모색하는 10여 개의 과제를 제시했다. 생사를 오가는 시간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돌연 끊겨버린 생계에 시름을 하는 사람들과 손님을 잃고 텅 빈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 곁에 옷 걱정은 꽤나 사치스럽지만, 그곳에도 어김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과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포드나 페라리가 돌연 마스크를 제조하고 디오르와 베르사체도 이에 동참하고, 그렇게 패션은 잠시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로 늘 일상 너머 있는 듯도 싶지만,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 엠마뉴엘 파네티가 5월 이슈를 화이트 블랭크 표지로 발매하며 이야기한 건 지극히 오늘, 일상의 문장이었다. '이런 사태 속에서 그저 가만히 있는 건...우리의 DNA가 아닙니다.' 패션이 내일, 아니 오늘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동이 제한된 시대에, 어쩌다 봄을 보내고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린 시절에 SS, FW로 시작하는 패션은 이미 끝이 난 계절인지 모른다. 톰 포드가 패션에 리셋 버튼을 누르며 제시한 화두 중 하나는 '슬로우 다운.' "패션은 늘 빠른 스피드에 취해있었다. 매해 반복되는 과잉 생산으로 재고는 쌓여만 간다"고 톰 포드는 말했다. 한 철을 앞서가던 패션 업계는 지금이야말로 오늘을 재고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대부분의 콜렉션이 취소되고 혹은 온라인, 혹은 영상 작품으로 대체되고...이건 그저 '하지 못함의 오늘'이지만, 그럼에도 패션의 '패뷸러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버질 아블로의 루이비통은 상하이에 거대한 항구를 재연하고 전적으로 '로컬리티'한 쇼를 펴내기도 했다. 키워드는 '업사이클링'과 '시즌 리스 Season-less.' "패션의 기반인 아이디어는 한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다. 과거에 발표한 콜렉션은 전 시즌으로 남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해가야 한다. 지난 시즌이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블로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잉여 옷감으로  25개의 룩, 과거 콜렉션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25룩, 그리고 약간의 온전한 신작품을 완성했다. 말하자면 재활용으로서의 '시즌 리스'를 2020년의 루이비통은 구현했다. 재활용이란 내일에 저항하는, 시간을 주도하는 실천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걸까. 서스태너빌리티를 이이갸하는 시대에, '시즌 리스', 계절을 지워가는 오늘은 총천연 비비드한 패션 속에서도 이상한 상실감을 남긴다.



요즘같은 시절에 패션의 자리는 얼마나 될까. 갑작스레 줄어든 수입을 만회하고, 만나지 못해 힘들어진 일들의 대안을 마련하고, 파스타 한 그릇과 커피 한 잔을 마실 즈음의 여유가 생긴 다음의 오후일까. 표지를 온통 하얗게 칠하며 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파네티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변함없이 스스로의 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이었다. 코로나가 무서워 밖엔 나가지 못하지만 괜시리 집에서 아끼는 옷을 입어보고, 금새 벗을지 모르지만 조금 다른 집에서의 나를 확인하고...패션은 애초 쓸모없는 쓸모의 한 벌이기도 했다. 없어도 상관없지만, 리미티드 에디션을 놓쳐서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별 거 아닌 쓸모없음에  하루는 조금 윤기를 내기도 한다. 근래의 일상은 만남도, 유흥도, 자유로운 시간도 앗아갔지만, 무엇보다 '쓸모없음'의 자리를 빼앗아버렸다. 나갈 일도 없는데...어차피 몇 번 입지도 못하는데... 옷장은 부쩍 빈 자리를 드러내고 있어도, 쓸모없다고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이후,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시절에 보테가베네타는 남자 콜렉션을 짧은 단편으로 대체 공개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다니엘 리와 포토그래퍼 타이론 르본이 기획하고 완성한 'VOTEGA BENETA : MEN.'  8분 남짓의 이 영상은 그저 모델 10여 명이 등장해 옷을 입고 또 입고, 또 입을 뿐이지만, '입다'라는 '옷의 일상'을 이 시절에 새삼 이야기하는 뭉클함이 있다. '남성'이라는 아이덴티티, 남자다움이란 에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여자도 등장하고, 단 한 벌의 옷이 나에 대한 표현, 정체성의 구현으로 살아왔던 세월이 단 8분에 압축되어 전달된다. 모델, 댄서, 배우, 뮤지션, 나는 잘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입는 옷에서 그들이 느껴진다. '입고싶은 옷을 입는다는 건 독립이었어요'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는 올리브색 니트 카디건에 검정 코트를 입고있었다.  쓸모없다는 건 가장 쓸모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https://www.bottegaveneta.com/jp/men_film_jp_section



코로나 이후 1년 두 번 쇼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된 시절에 마르지엘라가 공개한 2021 가을겨울 '유니 섹스 아티잔 콜렉션 ' 디자이너를 비롯 모든 게 꽁꽁 가려있던 마르지엘라가 콜렉션 제작 전반, 마지막은 인스톨레이션 작품으로 장식한  52분 짜리 다큐를 발표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일을 한다는 작업실 풍경은 늘 아름답고, 존 갈리아노를 시작으로 이번 연출을 맡은 닉 나이트, 나이트의 부인 샬롯, 잡지사 시절 외국 기사를 '빨면서' 종종 봤던 헤어 스타일리스트 유진 솔레이만 등이 채팅 창을 켜고 회의를 하는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조금의 위화감도 없어 오히려 놀랍다. 용기, 희망, 쾌락 주의를 테마로 진행된 콜렉션 전반을 지나 모델들의 춤사위로 작업 자체를 하나의 쇼이자, 아트로 만들어버리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패션이 왜 지금, 이 시절에 말문을 열었는지 몸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고보면, 마르지엘라가 '익명'을 유지해왔던 이유를 생각하면, 패션의 지형 자체가 불명확해진 지금, 이번 아티잔 콜렉션 공개는 오히려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콜렉션의 뮤즈 중 한 명인 안톤은 말을 하지 않(못)하는데, 마르지엘라는 결코 패션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패션이기에 가능한 몸과 마음과 감정의 '드레이프'를 완성한다. 이세이 미야케가 42년만에 휴업 선언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이지만, 또 한 벌의 옷을 사러가는 일상이 기다린다. 지금 이 시절의 오트쿠틔르는 조금 뭉클하다.

https://youtu.be/GCnbjRlICSQ





매거진의 이전글 한류라는, 새삼 묵은지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