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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20. 2017

코쿠리코 언덕에서와 요코하마

도시도 나이를 먹고, 때론 잘못을 저지르며, 반성을 하고, 미래를 찾는다

언덕에 오른 소녀가 깃발을 올린다. 도르레에 걸린 색색의 기신호(旗信號)는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향해있다. 1963년 요코하마. 도쿄올림픽을 앞둔 거리는 발전과 새로움의 물결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과거를 등진 채 빠른 발걸음을 놀린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새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전후 일본이 회복과 새로움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을 농밀하게 그린다.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과 각본을 맡고 그의 아들이자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의 감독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한 이 영화는 과거와 미래, 오래됨과 새로움, 전쟁과 회복에 대한 재고찰의 이야기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릴 때 아버지의 죽음에, 과거의 흔적에 빠져있는 주인공 소녀 우미를 통해, 스튜디오 지브리는 지나간 시간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세의 소중함을 전한다.


무대는 요코하마다. 본래 작품의 원형이 된 곳의 정보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지만 유독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한해 작품 속 배경이 1960년대 요코하마라고 명시했다. 그는 기획 단계부터 수차례 요코하마를 찾았고 작품 속 그림이 될 마을을 머릿속에 스케치해 갔다고 한다. 개방의 물결을 전선(前線)에서 맞은 도시 요코하마의 역사는 전후(戰後) 두 팔을 벌려 새로움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무대로 주효했다. 주인공 아미의 하숙집 ‘코쿠리코 장(莊’)이 위치한 언덕 마을, 위기에 처한 동아리 건물 ‘카르티에 라탱’의 양식, 어선이 나란히 늘어선 어촌 마을의 모습 등은 요코하마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유추해낸 그림들이다. 결과적으로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요코하마란 도시를 이해하는 충실한 텍스트가 됐다. 운이 좋게도 우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요코하마 가이드를 건네받은 셈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주인공 아미네가 운영하는 하숙집 마을이다. 언덕의 경사를 타고 사이사이 늘어선 집들은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양식 건축물을 닮았다. ‘코쿠리코’란 이름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지만 ‘요코하마 시티 가이드 협회’의 시마다 마사코 부회장은 1900년대 초 서양의 각 영사 저택이 모여 있던 야마테(山手) 지역이 모델이 됐을 거라 말했다. 전경으로 바다가 펼쳐지고 언덕의 굴곡을 골목길로 삼은 낭만적인 동네는 아직도 그 시절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무역상 B.R 베릭(Berrick)의 저택이었던 베릭 홀(Berrick Hall)은 이슬람과 유럽의 양식이 뒤섞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1930년 건축돼 2차세계대전 전까지 주택으로 쓰였고 이후 카톨릭계 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2001년 요코하마 시에 소유권이 넘어간 뒤부터는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야마테 지역 서양관 중 최대 규모로 미국의 건축가 J.H 모건(J. H Morgan)이 설계했다.


베릭 홀에서 나와 5분 정도만 걷다 보면 오른편에 야마테234번관(山手234番館)이 보인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을 떠났던 외국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1927년 지어진 공동주택으로 모든 공간이 콤팩트하게 설계됐다. 현재 1층에선 각종 전시와 공연이 정례적으로 열리며 2층은 대관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숫자만 바꿔 야마테 111번관(山手111番館)으로 가보면 넓은 잔디 정원이 기다리고 있다. 베릭 홀을 설계한 J. H 모건의 대표작으로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다. 과거 한 미국인이 살았던 집이며 콘크리트와 목재의 조화가 돋보인다. 장미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장미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각종 차를 즐길 수 있는 찻집이 있다. 발품을 팔며 서양관 도는 산책만으로 부족함을 느낀다면 야마테자료관(山手資料館)을 찾으면 도움이 된다. 야마테자료관은 요코하마 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메이지시대 목조 건물로 일본 최초의 신문 재팬 펀치(ジャパン パンチ), 외국인 묘지(外国人墓地), 야마테 지역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시대에 대한 기록이자 두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기도 한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또 다른 주요 무대는 야마시타 공원(山下公園)이다. 과거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두 청춘은 한 쪽으로 바다를 그리고 또 한쪽으론 마을을 둔 길을 애틋한 마음으로 걷는다. 야마시타 공원은 1930년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 임해공원으로 지금도 요코하마 시민들의 피크닉 장소, 연인들의 데이트 스폿으로 인기가 높다.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녹음과 갈매기의 울음소리 그리고 시원한 바다와 파도 소리가 산책 나온 이들을 기분 좋게 감싸준다. 특히 1930년 만들어진 일본의 화객선 히카와마루(氷川丸)가 정박해있는 스폿은 많은 사람들이 사진 촬영장소로 애용하고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수십 년 태평양을 돌던 배 안에 들어가 요코하마 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밤이면 불을 밝힌 갑판이 아름다운 야경까지 만들어준다.


그리고 또 하나 보이는 게 호텔 뉴 그랜드(Hotel New Grand)다. 영화에서도 두 소년, 소녀 뒤로 얼핏 보이는 이 호텔은 관동대지진 이후 도시 기능을 잃은 요코하마가 부흥 사업의 일환으로 지은 곳이다. 1927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당시 건물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본관은 관광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찰리 채플린, 전설의 메이저리거 베이비 루스, 영국 왕실가 등이 투숙한 기록을 가진 호텔계의 명소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이 켜켜이 쌓인 프랑스 스타일의 건물은 야마시타 공원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1999년 새로 지어진 신관이 시설은 더 깨끗하지만 역사를 간직한 구관의 객실은 프랑스 왕실의 스타일을 그대로 살려 색다른 투숙 경험을 제공한다.


미나토미라이 21 지역만 보면 요코하마는 그저 번지르르한 인공의 도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발품을 팔아 도시 깊숙이 들어가 보면 고층 빌딩숲과는 다른 풍경의 마을이 펼쳐진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슌의 집이 있기도 했던 부두 마을은 나카무라(中村) 강이 바다와 만나는 신야마시타(新山下町)다. 이곳은 일본의 전형적인 서민마을로 바다에 접한 집들 앞에 터그보트(Tugboat)가 한 대씩 놓여있다. 큰 어선의 경우 길목이 좁은 육지 쪽까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배가 중간지점까지 나가 대형 어선을 맞았다. 아직도 50년 전 마을의 골대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터그보트를 띄우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둘의 산책 코스로 자주 등장했던 곳이 바로 상점가다. 대형 슈퍼나 편의점이 없었던 1960년대 요코하마 사람들이 하루 찬거리를 위해 찾았던 곳은 동네 상점가였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등장하는 상점가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아미의 주소, 둘의 이동 경로를 볼 때 모토마치(元町) 상점가가 가장 유력하다.


모토마치 상점가는 1859년 개항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에게 물품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쇼핑 거리다. 당시 요코하마에선 일본인과 외국인의 거주 지역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필품을 모토마치 상점가에서 조달했다. 수많은 서구의 물건들이 이곳으로 모였고 그런 이유로 일본 최초란 타이틀을 가진, ‘모토마치 브랜드’라 불리는 가게들이 많다. 외국인 묘지에서 이시카와초(石川町) 역까지 세 개의 큰 길을 중심으로 400여 개의 가게들이 즐비해있으며, 번화한 상점가임에도 거리가 매우 단정하다. 상점가 번영회에서는 거리의 혼잡을 막기 위해 가게가 물건을 입고할 시 외부에 설치된 임시창고와 상점가에서 운영하는 공용 트럭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차가 드나듦에도 번잡한 느낌 없이 쇼핑을 즐길 수 있다.


밝고 유쾌해 보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사실 비관의 전제를 깔고 있다. 회복되지 못하는 자연, 개선되지 못하는 인간의 우둔함, 자연의 섭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성 세대 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떠올려낸 이야기들은 사실 세상의 어둠에서 건진 비판극에 가깝다. 단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는 동시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잘못이 잘못임을 직시하면서, 어둠을 어둠으로 밝히면서 현실의 과제를 공론화해낸다. <코쿠리코 언덕에서>가 보여주는 일본의 현실도 그렇다. 전후 세대의 풀리지 못한 과제는 요코하마의 역사와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다.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최대 위기에 빠진 일본에서 그는 60년대의 역사를 끄집어냈다. 요코하마를 무대로 올리면서 당시의 활기를, 그리고 과오를 떠올리자고 제안했다. 항구도시 요코하마가 가진 개방성, 동시에 그 넓은 폭에 묻혀버린 과거의 숙제는 자연 재앙 앞에 무릎 꿇은 일본이 돌이켜봐야 할 가장 가까운 과거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기록이 요코하마를 몰랐던 여행자에게 충실하고 효율적인 교과서가 됐다. 주인공 아미와 슌의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떠올리면서 요코하마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 보았다. 도시도 나이를 먹고, 때론 잘못을 저지르며, 반성을 하고, 미래를 찾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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