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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07. 2017

반 보의 희망

늦었다고 애탈 거 없다. 멀었다고 초조해할 거 없다

가족 전원이 실직자다. 아빠 토미카와 요스케(미우라 토모카즈)는 성희롱 사건에 휘말려 임원 승진 코 앞에서 물러났고, 엄마 미즈키(쿠로키 히토미)는 학생을 반에 배정하는데 실수를 저질러 책임을 지고 그만뒀다. 딸 시오리(마에다 아츠코)는 사내 연애가 들통나 상사에 떠밀리듯 회사를 떠났고, 아들 히카루(쿠도 아스카)는 내정 하나 못 받고 매일 취업 활동 중이다. 아사히 TV에서 올해 초 방영된 <취활가족~분명 잘 될거야~>는 직장 구하기 힘든 세태를 한 가정 안에서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남 부러울 것 없이 화목했던 가정은 구직난과 트러블로 엉망진창이 되고만다. 지금의 일본은 구직난이 아닌 구인난으로 허덕인다지만 드라마는 사람이 일을 찾고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느긋한 리듬으로 그려낸다.


뒤늦은 사춘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파견 회사를 옮겨다니는 죠타로(이쿠타 토마)는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고, 연구에 뜻을 품고 의사가 됐지만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니카이도(마키 요코)는 교수의 지시 하에 고향 시만토에 내려와 시골 의사가 되버린다. 시만토에 대한 애정 하나로 아빠의 철물점을 이을 생각이었지만 점점 늘언만가는 폐점 행렬에 낙심한 준이치(키리타니 켄지)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고등학교 시절 4번 타자로 명성을 날렸던 히로키(에모토 타스쿠)는 살아갈 활기를 잃었다. 고교 후 입사, 맞선 후 결혼으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니카이도의 언니(쿠니나카 료코)와 국회의원 아빠의 그늘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나(키무라 후미노)까지. 모두 다 꽃을 피우지 못했다. 2012년 후지TV에서 방영된 <늦게 피는 해바라기~내 인생 리뉴얼~>는 기나긴 삶의 거리 위에서 의도치 않게 멈처 선 이들의 이야기다. 인구 3만 8천의 작은 마을에서 이들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가지 못한다 .  


그렇게 재미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둘 다 그렇다. 그런데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은 있다. 그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삶의 기품이 드러나는 대사인데 구구절절이 마음에 다가온다. 예를 들어 재취업을 고민 중인 요스케는 사이가 서먹해진 아내 미즈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우리는 매일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난 지금이 가장 젊은 때라 생각해. 지금 내 꿈을 이루게 해주면 좋겠어." 시간을 초월하는 꿈, 이는 젊음에 국한된 게 아니다. 청소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요스케는 자신의 시작점을 되돌아봤을 거다. 대학을 졸업해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을, 입사 해 회사에 적응해나가던 때를, 그리고 완전한 샐러리맨이 되어 안정된 가정을 꾸렸을 시간을. 이렇게가 한 사람의 인생 줄기다. 하지만 시작은 어느 시점에나 있을 수 있다. <취활가족~분명 잘 될거야~>가 가족 전원을 실직자로 만들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마 우리에겐 모두 재시작의 지점이 있다는 걸거다.


파견처를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살았던 조타로는 무언가에 열중해 본 적이 없다. 3년 계약이 끝나면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났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이 청년은 골똘이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루살이의 기분으로 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죠타로가 시만토로 내려오면서 그의 인생이 새로운 장을 연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차에 태어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발을 다친 할아버지를 위해 논밭 일을 대신하며, 지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축제를 준비하면서 인생의 반전을 맞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목표가,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는 게 아니다. 하루 아침에 사람이 변했다는 얘기도 아니다. 시만토 지역 부흥 협력단에서 일하며 죠타로는 자신을 부흥하는 법을 배웠다. 삶의 교훈을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해나가면 된다"는 것," 커다란 목표가 때로는 커다란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머나먼 계획이 아득하게만 보일 때도 있다. 밭일을 하다 다리를 다친 킨지 씨는 재활을 하며 반 보씩, 반 보씩 걷는다. 반 보가 모여 한 보가 되고, 한 보가 모여 두 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걷는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늦었다고 애탈 거 없다. 멀었다고 초조해할 거 없다. 우리에겐 딱 반 보, 반 보의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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