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이해하려는 몇 개의 밤에 관하여
타케우치 유코가 죽었다. 지난 해에만 세 편, 올해에도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타케우치 유코가 죽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둘째 아들 돌이 지난 게 지난 8월인데, 2020년 9월 27일, 그녀의 부고가 들려왔다. 세상은 늘, 언제나 그렇듯 죽음을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지만, 정작 죽음이 이곳에 남기는 건 한 줌의 먼지도 되지 않는다. 시부야구 메조네 타이프 맨션, 늦은 밤 베란다에서의 10분, 남편 나카무라 타이키와 큰 아들과 보냈던 단란했던 저녁..미디어는 누가 더 디테일하나 내기라도 하는듯 연일 뉴스를 쏟아내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부고는 사실 무능하다. 떠나버린 열차처럼, 닫혀버린 문이거나 봉해진 편지, 자물쇠가 걸린 금고만큼 실속이 없어 나는 그저 실소가 난다. 별로 애타지도 않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꿍꿍이가 독점이란 딱지를 단 채 무수한 말들을 뱉어내는 사이, '그 후'의 시간이 지나간다. 며칠이 지나 오후, 나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영화 '천천히 조금씩 안녕(長いお別れ)'을 보고싶다 생각했다.
인생에 계절이 있다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온 듯 체감하는 나이에, '하지 못한 말'의 자리는 나이와 비례해 늘어간다. 사람은 말도, 글도, 이야기도 가지고 있지만 말로도, 글로도 이해되지 못하는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그렇게 흘러가는 오해의 세월은 어느새 이해의 시간을 따라잡는다. 때로는 실패 또는 상처, 아니면 치명적인 슬픔들. 이런 자리에 공감이란 말은 참 따뜻하고 아름답게 느껴져도, 그 만큼 주관적인 것도 없어 나의 공감과 너의 공감은 모두 조금의 착각에 기대고 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너가 될 수는 없어, 그리고 그 반대의 자리에서 공감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차이'들.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이런 아이러니를, 나는 이제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오해는 푸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던 가을 바람이, 오해로 남아버린 '마음'의 겨울녘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그 후'의 너와 내가 몹시 걱정스러워지는 서른 중턱. 오해는 (어쩌면) 고독으로 남는다.
영화는 사실 좀 많이 아쉽다. '행복 목욕탕', 집 나간 아빠의 부고와 마주하는 '아빠를 찾으러チチを撮りに)', 그리고 올해는 가족 사진으로 기무라이헤이 상까지 탔던 사진가 아사이 마사시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아사다계(浅田家)'를 만들었던 나카노 료타 감독이니 예상은 가능하지만, 또 가족이, 그리고 죽음이 나온다. 제목부터 영어로 알츠하이머를 암시하는 long goodbye(長い別れ). 한국어론 '천천히 조금씩 안녕.' 균열이 생긴 가족, 멀어진 만큼 낯설어진 관계, 그럼에도 기억하는 시간과 돌아가야 하는 '집'에 대한 서사를 이렇게나 꾸준히, 딴짓 한번 없이 해오는 감독도 흔치는 않을텐데, '천천히 조금씩 안녕'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아마도 나카지마 쿄코의 원작 소설, 실제 부친을 알츠하이머로 보냈던 작가의 경험을 담은 소설 아닌 소설을 가볍게 넘겨버리지 못한 고민 때문이었겠지만, 그렇게 영화적 리얼리티가 빈약하다. 우리가 치매(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알고있는 의외로 알려진 사실들이 별 다른 영화적 고민없이 나열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때의 딜레마이지만, 나카노 료타는 조금 더 삶, '생'을 바라봐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엔 죽음과도 같은, 죽음의 고독을 닮은 너와 나의 관계들이 흘러간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떠났던 가족이 돌아오거나, 화해하는 일들은 왕왕 벌어지지만, 사실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건 영화가 가장 영화적일 때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 거대한 재앙을 겪은 이후, 혹은 가까운 지인의 죽음에 한바탕 눈물을 쏟았을 때, 묘하고도 이상하게 마음이 경건해지는 건, 분명 현실이지만 어쩌면 그 이상이고, 그렇게 가장 죽음 가까이에 선다. 일본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적응하지 못한 삶을 사는 마리(타케우치 유코)가 남편과 아들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동생 후미(아오이 유우)와 영상 통화를 하지만, 그만큼 그녀 곁엔 고독이 자란다. 아빠 간호로 정사원 제안을 거절하는 후미가 그저 고개만 숙이는 장면도, 동거하던 남자가 전처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저 걸음을 돌려 눈물을 닦아내는 대목도, '말하지 못하는 말', 세상 고독이라 설명되는 감정이 겨우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찰나이다. 죽음은 사실 내 안에 가려져있는 '고독', '하지 못한 말들'의 자리를 남기고 떠나곤 한다.
내가 대가족의 막내 아들이란 걸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자로 살았으니 그만큼 많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을텐데,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얼마나 알고있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다. 작금의 코로나가 그간의 평범한 일상을 새삼 감각하게 하듯이, 죽음이란 고요, 고독, 멈춤의 순간은 지나간 나의 '생'들을 여러모로 생각하게 한다. 미우라 하루마가 갑자기 옷장에서 목을 맸을 때, 타케우치 유코가 베란다에서 밤바람을 쐰 뒤 시체로 발견됐을 때, 나는 그들만이 알고있을, 그 둘밖에 모를 마지막 순간, 생의 이쪽이 아니라 죽음의 그쪽을 향하던 그들의 시간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살고있으면, 오해를 사더라고 살고만 있다면 언젠가, 속된말로 기회라는 게 있을텐데, 그야말로 끝이 나버린, 오해로 문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를 그 모든 것들이 애처로웠다. 고독이 고독의 허용치를 넘으면 세상을 뜨게되는 걸까. 마리의 아들, 영화에서 할아버지의 손주 타카시는 바다 너머 캘리포니아에서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얄궂게도 이해와 오해는 한 자 차. 나와 너 사이의 단 한 글자. 추석의 늦은 저녁, 구름에 가린 보름달이 조금 가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