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우유를 부으면 까맣게 牛乳. 커피를 담으면 하얀 글씨로 珈琲. 최근 트위터에서 이 별 거 아닌 유리컵이 화제다. 처음 봤을 땐 서로 다른 두 개의 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색이 없는 유리잔에 하양은 검정을, 검정은 하양을 드러낸다. 컵을 디자인한 츠지오 잇페이는 커피는 까맣고, 우유는 하얗다는 사실에 착안해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새삼,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을 조금 허무한 아이디어. 하지만 세상 모든 화제엔 이유가 있고, 커피를 커피라고, 우유로 우유라고 이야기할 땐 그만큼의 안도가 전해진다. 오래 전 일러스트레이터 노리타케가 선보였던 THIS IS PEN과 같이. 일상을 살며 새삼 일상을 기다리는 포스트 코로나, 커피가 커피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카페 오레를 부으면 자연스레 牛乳와 珈琲가 나란히 쓰여진다. 좀 예쁘지 않긴 하지만.
갑자기 달아난 '외출'이 외출의 자리를 알게하듯, 돌연 들이닥친 역병에 무색무취의 일상은 자리를 드러낸다. 밥먹고 자고 일어나고, 의식주의 무한 반복으로 흘러가던 날들이 갑작스런 '멈춤'에 '살고있다'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근래의 음악 스트리밍을 너머 커피, 책, 심지어 스니커즈까지 서브스크립션을 하고있는 걸 보면 일상은 어쩌면 일상이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우유가, 종이 신문이 그랬던 것처럼 의식주도 아니면서 24시간의 한 자리씩 차지하곤 했던 그런 것들. 이름도 번지르르하게 서브스크립션이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말은 지극히 일상을 바라보는 애탄 마음을 가리킨다. 물론 여느 마케터는 별로 그럴 맘이 없을지 모르지만...서브스크는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일어나는 '일상', 그런 새로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뮤직 스트리밍, 넷플릭스, 책 배달 서비스...늘어나는 서브스크 행렬에 세상은 새로운 소비 패턴을 말하기 시작하고, 하다못해 일본에선 자판기 서브스크가 시작됐다. 동일본 JR 워터 비지니스가 9월부터 JR 역내 자판기에 일종의 데일리 패스 'every pass' 이용객을 모집했다. 자사의 음료만을 고를 수 있는 플랜과 제조사 구분없이 이용이 가능한 프리미엄 플랜, 두 가지를 제공하고, 전자는 월 980엔, 후자는 2980엔에 매일 한 병의 드링크를 마실 수 있다. 방식은 이른 아침 이용자에게 발송되는 QR 코트로 회원임을 인증하고 결제되는 시스템. 사실 이 서비스는 이미 한 차례 지난 10월 1차로 회원을 모집한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굳이 코로나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묘한 어제의 기억같은 구석이 있다. 2000년 피크를 찍으며 활황을, 이후엔 편의점 등장으로 하양세를, 그리고 지금은 별 다른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곳엔 어김없이 자판기가 스쳐가는 일상의 역사가 살아있다. 국내에선 미소시루랄지, 파스타랄지, 심지어 여행권 자판기 같이 별난 이슈처럼 보도되기도 했지만, 자판기의 그런 '딴짓'은 사실 재미, 그리고 시대를 버텨내기 위한 새로운 일상이기도 하다. 가령 50년 넘게 캔커피를 만들고 있는 '다이도'가 지난 6월 자사의 본거지인 시즈오카에 뒷면을 앞으로 돌린, 패키지를 앞뒤 180도 회전한 '뒷면(裏面) 자판기'을 도입한 것처럼. "자판기로 구입을 할 때도 성분 표시, 칼로리를 확인하고 싶다는 의견에 기획했습니다"라고, 다이도 마케팅 담당자는 말한다. 일상은 때때로 일상이기 위해 '딴짓'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자판기를 둘러싼 지금 일본 내의 변화는 여느 업종만큼 활발하다. 3밀(密)을 피하자고 말하는 그곳에서 접촉 없이 구매가 불가능한 자판기는 치명적인 구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커피 브랜드 '다이도'는 발로 터치를 하면 음료가 떨어지는 방식의 자판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단순히 손으로 하던 동작을 발로 가져왔을 뿐인데 어쨌든 3밀의 하나, 접촉을 피할 수 있다. 또 하나, 일본의 녹차 브랜드 '이토엔'은 차를 우려내고 생기는 껍질 속 성분 카토킨의 항균 효과를 활용해 '항균 실'을 만들어 자판기 버튼, 지폐 투입구, 잔돈 반환구, 음료를 꺼내는 레버 등, 손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부착했고, 연간 6만 7천톤이 발생한다는 그 껍질을 활용한 100여 종의 리사이클링 사업도 전개되고 있다. 기계와 나와의 주고받는 장사이지만, '이후'를 바라보는 반성의 시간이, 내가 아닌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의 자리가 그곳에 있다. 골목을 걷다보면 종종 자판기를 보면 발걸음이 멈추곤 하는데, 그건 도시가, 내가, 그리고 너가 살아가는 '일상'과의 마주침인지 모른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산다는 건, 도시의 한 나절을 보낸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근래 가장 충격적이었던 자판기 소식은 아마 '브래드 피트가 마신 물 10만엔'일 것이다. 내용은 그저 300ml 짜리 미네랄 워터인데, 옆에서 함께 판매되는 게 '300ml 밖에 없는 천연수', '300ml나 있는 천연수', '좋아요 받기 좋은 천연수', '마시면 불행해지는 천연수'... 네이밍이 가관인다. 이쯤 되면 누군가의 장난처럼도 느껴지는데 그 중 몇몇은 '품절', 버튼의 램프가 꺼져있다. 내용물은 모두 똑같은 미네랄 워터 300ml 한 병, 가격은 30엔에서 10만엔까지 수 천배나 차이가 난다. 하지만 300ml의 '나'와 '모'에서 느껴지듯, 이건 일종의 네이밍과 인식 사이의 실험. 도쿄 스미다쿠에서 열리고 있는 '스미다 무코지마 EXPO 2020'에 출품된 사마타 카즈키의 작품이다. 작품이지만 실제로 판매는 한다. 사마타는 "표현(이름)에 따라 가격이 다른 상품을 일상에서 마주하면 피식 웃거나, 본질을 가리고 있는 말에 우리가 좌우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이야기했다. 무슨무슨 물이 아닌, 갈증을 해소해줄 물, 수분을 보충해줄 물, 더위를 식혀줄 물... 물을 물이라 이야기하는 일상같지 않은 일상이 지금 자판기 하나에서 실험되고 있다.
사마타 카즈키의 이 자판기 이름은 '구매하면 행복해지는 자동판매기'다. 판매하는 상품은 모두 24종. 이름은 어느하나 같지않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물. 조금은 우리의 일상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이 다른 듯 싶지만 돌아보면 하나의 커다란 '어제'가 보일 뿐이고, 지금은 여전히 어색하고 생경하기만 하지만 어쩌면 이름만 조금 다를 뿐, 실수로 자판기의 '누르면 불행해지는 물'같은 걸 눌러버렸을 뿐인 이야기인지 모른다. 1/24의 확률과 남아있는 23/24의 경우의 수. 사마타의 자판기 앞에서 '행복'을 노리지 않는 이는 없을 테고, 일상이 향하는 곳도 분명, 아마도 '행복'이다. 일단은 안전하게 '70엔짜리 보통의 천연수'를 누를지 모르지만, 나머지 23종의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24종의 물들은 지금, 1년 12개월의 일상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