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준비하고 있는 책이 연기에 연기를 거쳐 일년이나 지나 겨우 고개를 내밀려 하는 것처럼, 혹은 나의 사소로운 일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일본이란 두 글자는 이곳에서 좀 조심스럽다. 지난 한 해 잡지에 기획을 내고 기사를 쓸 때마다 일본과 관련된 이모저모는 최소한만 남긴 채 거세됐고, 기획안을 낼 때면 '일본 외에서 생각해봐'란 답이 자동 맞춘 문장처럼 돌아왔다. 물론 이유를, 일본과 우리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배경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곳에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때론 울었던 나로서는 참...얄궂은 시절이다.
지난 늦여름부터 준비했던 책의 주제는 '도쿄의 젊은 장인들.' 2020 올림픽이 2021이 되기 이전, 한 번의 10년이 지나고 또 한 번의 10년이 시작하려던 즈음, 이곳에선 금기에 가까운 '헤세이' 이후 '레이와'란 이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던 무렵, 도쿄는 아마 가장 재미있는 '오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된 노포들이 문을 닫고, '재개발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도쿄 곳곳이 해체되고, 마을엔 점점 어제의 빈자리가 늘어가고.. 그럼에도 책방이 없어진 곳에 책방을 열고, 지하 공원을 설계하고, 공중 도시를 건축하는, 그곳은 어쩌면 도시가,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한 단층처럼도 보였다.
그곳을 남겨두고 싶어서, '불매운동', '코로나' 세상이 요동을 쳐도 변하지 않는 건 아마도 '사람'이란 생각에 장인의 문을 두드렸는지 모른다. 벌써 오래 전, 긴자의 책방 '모리오카 서점'을 운영하는 모리오카 요시유키 씨는 내게 메일로 이렇게 애기해줬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국경은 없습니다.'
한국의 일본을 향한 마음은 나날이 등을 돌리고 있는 듯 싶지만, 일본에선 요즘 다시 3차를 넘어 4차 한류를 이야기한다. 불매를 하고, 왜색을 지우고, 케케묵은 역사를 꺼내와 열을 올리는 우리와 달리 그곳에선 '한국 드라마'를, 한국 노래를, 한국의 뷰티와 패션을 세월이 몰라라 마음껏 즐긴다. 물론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세월의 난제가 그들과 우리 사이엔 산적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오늘'만은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국내에선 별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태원 클래스'가 박새로이 열풍과 함께 열도를 들썩이게 하고 '사랑의 불시착'은 새삼 현빈을 이케멘 정상에 올려세웠놓기도 하고, 지난 3월에서 6월까지 그곳의 넷플릭스에서 1, 2위를 다툰 건 두 편의 한국 드라마다. 나가사와 마사미는 아무렇지 않게 박서준에게 어필을 하고, EXILE'로 유명한 댄스 그룹 프로덕션 의 'J SOUL BROTHER' 멤버 가 새로이의 머리 스타일을 한 채 사진을 올렸을 때, 나는 '문화'라는 유기체가 어느새 시대적 아이덴티티가 되어 약동하는 '오늘'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대부분 넷플릭스의 영향이겠지만, 아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에선 새로이의 헤어스타일을 '쿠리아타마(밤톨 머리)'라고 부른다.
나의 경우 '이태원 클라쓰'는 어딘가 만들다 만 듯한, 껍질만 훑는 듯한 만듦새에 1편도 보지 못한 채 넘겨버렸지만 장인을 취재하며 알게된 콜라 장인 코바야시는 메일로 그 드라마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이후 난 다시 넷플릭스에 접속하고 '이태원 클라스'를 역주행했는데, 세상엔 이렇게 알게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했다. 너와 내가 사는 세계의 어떤 '역전'의 순간. 지난 10월 도쿄 시부야엔 국내 편집숍 ALAND가 문을 열었고, 이 가게 오픈날엔 비가 오는 날씨에도 긴 행렬이 줄을 이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르바이트 모집에만 900여명이 몰렸다고 한다. ALNAD라면, 오래 전 아직은 나이를 2자로 세던 시절, 명동 매장을 훑으며 '코트에서 바퀴벌레 나왔어'같은 말을 지껄이곤 했는데, ALNAD를 가져간 일본의 패션 그룹 ADSTRIA의 담당자는 "일본에도 '한국같은 것'은 이미 많지만, '한국 그 자체'를 소구하는 타깃이 분명 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한국같은, 한국 스타일이 아닌 한국 그 자체. 일본을 훔쳐보며 한국을 비웃곤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황당하고 새삼 올드패션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2000년대 초 한류 오바상들의 거리였던 신오오쿠보가 지금 하라쥬쿠 못지않은 1020으로 들썩이는 것처럼, 그만큼의 역전, 혹은 시절, 세월이 그곳과 이곳 사이에 흐르고, 쌓여간다.
코로나가 새삼 알려주는 세상의 많은 '진실'은 시간을 거슬러 일상의 역사를 뒤돌아보게 하지만, 이상하게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그와 별 상관이 없는 듯한, 익숙하고 낯선 형태의 '오늘'들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이야 전세계 공통 화제작이니 말할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일본에선 한 달만에 1백만 관객을 돌파했고, 사이토 타쿠미를 비롯 요시자와 료, 나카노 타이가 등 팬을 자처하는 배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두 손 들고 반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열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발표한 건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영화이고, '브로커(가제)'라 이름붙은 이 영화는 배우도 스태프도, 로케이션도 모두 한국을 메인으로 진행된 순도 90% 쯤의 한국 영화다. 고레에다는 이 작품에 대해 "딱히 코로나랑 상관없어요. 5년 전 쯤부터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칸느, 베니스 등 영화제에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한 잔 하고, 두 잔 하고, 그러다 영화까지 같이 찍게됐다는 게 고레에다 감독, 그리고 주연 배우 송강호와 강동원 사이의 스토리다. 코로나 이후, 세상은 옴짝달싹 발이 묶인 듯도 싶지만, 이상하게 옆을 바라보는, 주위를 살피는 듯한, 어쩌면 '수평'을 닮은, 그런 오늘, 그리고 내일이 흘러간다.
지난 밤 스다 마사키의 라디오를 듣다 자려던 잠에서 홀랑 깨고 말았다. 일본에선 6월까지 박진영의 아이돌 오디션 방송, '니지(虹)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박진영은 요즘 J. Y. PARK란 이름으로 그곳에서 꽤 유명 인사가 됐다. 소니 뮤직과 JYP 엔터테인먼트가 함께 제작한 방송이고, '니혼테레비', 그리고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방송이 되었다. 그 결과로 NiziU란 걸그룸이 탄생한다. 사실 난 방송은 한 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일본에선 '트와이스'의 '직계' 아이돌이 탄생한다며 꽤 술렁이는 분위기다. 스다도 나만큼 이 프로젝트를 잘 모르는지 실시간 청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보같은,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을 참 잘도 쏟아냈다. 'J. Y. PARK씨는 Y가 미들 네임? J. K. 롤링같은 거?', 감았던 눈이 활짝 떠졌다. 옆에 있던 타이가는 '콘도 코엔(公園, 공원) 씨가 배우 활동 이름 정하면서 '코엔'으로 할지 '파-크'로 할지 고민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웃음이 터져 이불로 입을 틀어막았다. 둘의 말장난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J. Y. PARK의 '니지' 프로젝트는 스다가 주제가를 맡은 '도라에몽' 신 시리즈 '니지(虹)'와 만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새삼 참 모르고 살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다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와 3년 전 함께 '아, 황야'를 찍었던 양익준의 또 다른 영화 '시인의 사랑'이 다음 달 도쿄에서 개봉한다. 그러고보면 오래 전 대부분의 외화들은 시차를 갖고 국내에 도착했고, 오랜 시절 '금지' 딱지가 붙어있던 일본 영화는 더욱더 긴 세월의 차이를 두고 찾아왔는데, 세월의 두께는 어느새 그 '차이'를 무디게 하고, 영화에 대한 애탄 마음도 그만큼 희미해졌다. 하지만 무슨 우연인지 '시인의 사랑'은 양익준의 '아, 황야'가 공개되던 그 해 가을에 개봉한 영화다. 어쩌면 조금 늦은 2017년의 나머지 한 자락이 지금 도쿄에 도착하고 있는 듯한, 이 시절이기에 가능한 착각이 스쳐간다. 나는 이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양익준 감독과 잠시 마주쳐 짦은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고, 개봉 전 미리 공개된 '시인의 사랑'에 대한 일본 내 반응은 호평 일색이다. '이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주인공 시인의 감정을 알기 쉽게 말로서 치환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란 얼마나 임기응변적인가. 제주도의 아름답고 공포스런 풍경에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솟아난다. 어디에도 없는 호화로운 경험.'(오오모리 타츠시 감독), '양익준 씨가 갖고있는 부드러움과 아름다운 감수성, 기존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 부드러운 인간성을, 이만큼 생생하게 살려낸 작품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습니다.'(니시카와 미와 감독).
어찌보면 단 한 편의 영화가 '지금의 나'의 시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스다 마사키가 '시인의 사랑'를 보고 적은 메시지를 바라보면, 세상은 그저 작은 영화 하나에 나아가고, 일어서고, 방향을 틀기도 하는지 모른다. 지금 그저 필요한 건, 그런 조금은 '시적인', 문화를 경유하는 창의적 현실의 '내일'이 아닐까.
잠을 잃은 새벽, 그저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의 씨앗은 항상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사람은 늘 그것에만 매달린다. 전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는 듯한 얼굴로 울고있는 내게 화가 난다.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 걸가. 나는 무얼 바라고 있던걸까. 이 아름다움은 무언가. 솔직히 지금 난 뭐라고 쓰면 좋을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다시 양익준에 의해 앞으로 걸어갈 길이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다 마사키(배우)
*헤더 이미지는, 이번에 출간되는 저의 첫 번째 책 첫 번째 장인, 크래프트 콜라의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