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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Feb 06. 2021

복스러운 메타 영화의 탄생

영화를 나와 영화를 만나는 '찬실'의 기적같은 리얼리티



세상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때로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을 칭하는지 모른다. 추상적이고 애매하고 모호하기만 한 얘기를 주절거리고 있는 것 같지만, 오즈의 '동경 이야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영화로 보는 사람과, 삶의 고개고개 깃들어진 애수의 흔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나란히 술잔을 기울이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작 영화 한편에 정반대의 관점이 뒤섞여 공존하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이야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음이란 대상이 아닌, 행위의 차이이고, 깊이거나 너비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대립의 '관계망'이다. 현실은 온통 '보이는 것'들의 세상인 듯 싶지만 실은 보이지 않음과의 작용이기도 하고, 그렇게 알 수가 없다가도 어김없는 (보이는) 현실 앞에 무너지기도 한다. 지난 해 조용히 주목을 받았던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본 새벽,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아는 영화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잊고 있던 희망, 안도, 고독, 그리고 슬픔. 하지만 이런 건 어차피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고되고 그리고 유쾌하게 시작한다. 겨울의 초입, 골목을 산 오르듯 걷는 일행은 무거운 짐을 이고있고 그들은 지금 이사를 하는 중이다. 본래 이사라면 새로운 출발, 어제를 씻어내고 내일을 바라보는 맑은 하늘과 같은 장면일텐데, 이 영화에선 별로 그렇지가 않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비탈길을 오르는 이들은 그저 죽을 지경이고 "용달차 하나도 못 들어가는 길"이라는 인부 1(실은 스태프)의 하소연에, 찬실은 "다 망했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엔 이상하게 주어가 없다. 

찬실 일행은 이사를 하고 있지만, 그건 돌연 끝나버린, 계약 만료일과 같이 잘려나간 시간이고, '어제'에서 밀려난 잉여의 조각이다. 조금 설명을 하면 그들이 준비하던 영화는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소위 '엎어지고' 말았다. '하다 만 이야기', 바람 빠진 픽션의 논픽션. 세상엔 새로 출발하는 내일의 이사도 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밀려나온 길가에서의 이사도 있다. 불과 며칠 전 그들은 영화를 준비하며 살았지만, 그들을 살게했던 영화는 지금, 이곳에 없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무너진 영화, 픽션의 세계를 걸어나오며 시작하는 영화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지워지고 드러나는 '보임'의 세계가 이곳에 있다. 오즈 영화 깊숙이 숨어있던 '어제의 찬실'의 질감과 같은. 집은 보이는 부동산, 영화란 보이지 않는 비현실의 스토리인데, 둘은 자꾸만 서로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https://youtu.be/0mnh64vDJs4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살리는 건 전적으로 '찬실'의 캐릭터다. 오랜 시간 프로듀서로 활동해온 김초희 감독이 찬실이란 역할로 또 한 번의 PD를 사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PD라는 알 듯 모를 듯 알 것 같기도 한 직군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것은 물론,  이도저도 하지만 이도저도 아니기도 한 그 직업의 '애매성'을 현실과 비현실, 삶 한 켠의 영화를 사유하는 모티브로 적절하게 활용한다. 20년간 매달렸던 영화 일이 돌연 증발했을 때 막막한 생계의 문제는 지독히 현실적이지만, 영화이자 곧 삶이었던 20여 년이란 세월의 갑작스런 부재는 보다 근원적인 상실, 현실 너머의 '삶',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프로듀서라는, 영화라는 픽션과 현장이란 논픽션을 오가는 이의 인생이라면 더욱더. 찬실은 삶이라는 현실에 영화란 픽션을 비춰보게 하는, 실은 가장 오묘한 캐릭터인 것이다. 그녀는 당장 눈앞에 돈이 없는 이유로 여배우의 가사 도우미 일을 불평없이 하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고 바닥 청소를 하고 갑작스런 손님에 방에 숨어 소리도 못내고 있지만, 찬실의 영화, '그 후'의 삶을 보면, 픽션이 사라진 뒤 드러난 논픽션, 현실의 일상처럼도 느껴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영화는 어쩌면 늘 그 사이의 리얼리티이곤 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란 매체의 속성, 현실에 존재하는 비현실로서의 픽션을 가장 절실하게, 애절하게 그려낸 한 편이다. '뒷산에 살리라'가 엎어지고 뒷산에 이사와 생활하는 찬실의 이야기는, 소위 유명한 배우나 감독이 이야기하는 '제 삶이 영화였죠'와 같은 말들의 가장 현실적은 구현이기도 하다. 새로 이사를 온 집에서 주인(윤여정)이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질문했을 때, "그래서 PD가 뭐하는데"라 재차 물었을 때, 찬실이가 "이제는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장면은, 20년 직업을 잃어버린 허망함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대한 은유, 비현실적인 리얼리티의 상실을 바라보고 있다. 찬실은 영화를 잃고, PD란 말은 이제 호칭일 뿐이고, 방에 쌓인 영화 잡지, VHS는 쓸모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지만, 영화는 영화를 인용하며, 보이는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기억 속 현실을 소환하며, 찬실을 구원한다. 이불 빨래를 하던 찬실 앞에 슬쩍 장국영이 나타났을 때, 그 천연덕스러운 판타지가 아무렇지 않게 햇살 좋은 오후 마당으로 스며들었을 때, 난 이 영화를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PD의 삶을 '보이는 시간'으로 재현하고, 술자리에서나 흘러가는 비현실의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렇게 찬실의 잃어버린 20년을 시작하는 20년으로 돌려놓는다. 


영화여서 가능한 일. 세상은 어김없이 보이는 현실이지만, 20년을 영화로 살았던 시간은 때로 보이지 않는 내일을 만난다. 우리가 영화를 산다는 건, 이렇게 좀 뻥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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