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건 내게 가장 친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일인지 모른다. 오래 전 혼자 살던 집에서 엄마 곁에 돌아와 오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며, 내게 보인 건 조금 다른 엄마와 누나들, 그리고 가족이었다. 딱딱하게 이야기하면 언제나 엄마의 아들, 그리고 누나들의 동생으로 살았던 시간으로부터의 '멈춤', 이후 그려진 것들이겠지만, 지난 가을 난 처음으로 자전적 에세이를 쓰며 그들은 나를 아는 오랜 타인들이라고 적었다. 엄마도 한 명의 여자이고, 누나들도 나와 같은, 그저 성性이 다른 내가 아닌 너라는 것. 별 다른 발견도 되지 못할 이야기지만, 사실 충격이란 내가 품고있는 아직 보지 못한 '낯섦'에서 시작하곤 한다. 그래서 봉준호는 '마더'를 그렇게 살벌하게 그렸을까. 그러고보면 더 오래 전 사카모토 유지는 또 다른, 조금 더 속절업는 '마더'를 드러냈고, 국내에서 리메이크까지 됐던 이 드라마는 당시 적지 않은 '엄마상像'에 대한 파열을 일으키기도 했다. 엄마란 누구인가. 새삼, 엄마란 누구인가. 자비에 돌란은 2009년 데뷔를 한 뒤 모두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며 대부분 엄마의 품속에서 버둥대며 이야기해왔는데, 나는 그에게 늘 따라붙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보다, 마더 콤플렉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던 에디프스적 얼개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또 한 번의 '엄마'에 대한 도발, 오오모리 아츠시의 '마더'를 본 날, 엄마가 나를 불렀다.
오오모리 타츠시의 영화는 이야기의 진입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가, 전개가 빤히 보여 느껴지는 용이함의 '시간'을 말하는 건 아니고, 돌연 시야를 환기하는 듯한 이질감, 어떤 생경함에 보지 못했던 세계가 드러나며 벌어지는 일이다. 가령 그의 전작 '일일시호일'에서 주인공 노리코(쿠로키 하나)가 엄마 아빠에 이끌려 영화를 보고 돌아오며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었는데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몰라"라고 투덜거릴 때, 페데리코 펠리니의 1957년작 '길'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흘러 알게되는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 세상을 향한 은유에 차 한 잔처럼 부드럽게 수렴한다. 그리고 내가 그를 알게된 첫 번째 영화 '세토우츠미'에서 오오모리는 방과후 강둑에 앉아 시시껍잖은 이야기나 주고받는 세토(스다 마사키)와 우츠미(이케마츠 소스케) '만'을 바라보며, 말 그대로 그것만 찍어대며 그렇게 '드러나는' 그만큼의 세계를 보여준다. 둘 앞을 생뚱맞게 지나가던 광대가 괜히 팬토마임을 하는 게 아니다. 오오모리의 세계는 딱 그렇게, 그만큼, 작은 구술의 만화경처럼 그려진다. 세상엔 바로 알 수 있는 것과 시간과 함께 알게되는 것이 있다는 건 때로 '보이는 것' 사이에서 '보이지 않음'을 바라봄을 의미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대부분 두 사람 사이에서, 웬만하면 셋을 넘어가지 않는 인간 모형 안에서 오오모리는 세계의 너머를 바라보고, 그렇게 드러난 세상의 바닥은 때로 당혹스럽기만 하다. 둘 아니면 셋. 세상엔 그렇게 이야기되는 현실이 있다.
그리고, '마더'에서, 영화엔 엄마와 아들, 딱 둘이 등장한다. 물론 둘을 스쳐가는, 때론 오래 머무는, 그리고 떠났다 다시 찾아오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영화는 전적으로 엄마와 아들, 아들과 엄마 사이에 작동하는, 딱 그만큼의 '세계' 안에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아들 슈헤이(오쿠다이라 다이켄)는 무릎을 다쳐 수업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고, 이와 마주친 엄마 아키코(나가사와 마사미)는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아들 무릎을 혀를 길게 내밀어 핥는다. 여기서 '혀로 상처를 핥는다'는 건 우리가 흔히 아는 침으로 다친 곳을 치료해준다는 민간요법 상의 할머니 훈훈한 마음같은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묘한, 그리고 기괴한 사람이기 이전, 동물로서의, 문명 하에 '보통'이라 정해진 범주를 벗어난 '성질'이다. 그리고 아키코는 말한다. "엄마도 일 땡땡이쳤어." '마더'라고, '엄마'라고 제목부터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 두 자에 대한 도발로 시작한다. 오오모리 아츠시는 늘 인터뷰에서 "현실 밖에 있는 것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통해 세상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마더'에서 그는 엄마, '모성'이라는 좀처럼 부정하기 힘든 현실의 어떤 '이상理想'을 건드린다. 말로하기 힘든 커뮤니케이션, 영화란 필터를 두르지 않으면 드러내기 힘든 관계, 사람의 체취랄지, 몸동작, 체온 등이 이야기하는 것. 그곳에 '마더'는 우리가 알던 '엄마'가 아니고, 온화한 질감을 벗어낸 그 단어는 조금 낯선, 날선 이야기를 한다.
'마더'는 시종일간 불안의 줄타기를 하는 작품이다. 아동 학대, 방치, 그리고 아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엄마의 이상한 사랑. 어떤 영문에서 아키코가 험난한 길 속에 빠져버렸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영화는 이상하게 벼랑 끝에서도 두 시간 넘는 시간을 버틴다. 좀처럼 믿기 힘든 두 모자 간의 짙은 늪 속을 걸어 들어가는 이야기는 사실 2017년 에서 벌어진 조부모 살해 사건에서 기반했고, 그렇게 픽션으로도 불안한 이야기는 픽션을 넘어 현실 속 보이지 않던 세계로 추락하며 묘하게 비상한다. 돈이 떨어지면 친가에 가 손을 벌리고, 그도 모자라면 아들을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하고, 그도 되지 않는 날엔 파친코에서 남자를 엮기나 하는 여자, 아니 엄마. 어김없이 모성의 책임을 묻게 하는 일생을 그리지만, 이 영화가 바라보는 건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도덕과 윤리로 재단된 세계에서의 모성, 그리고 엄마가 아니다. 오히려 '마더'는 우리가 아는 '엄마', 모성의 이해 불가한, 형용할 수 없는 관용, 베품과 마찬가지의 크기로, 정반대 자리에서 엄마의 어떤 끈질기게 생존하는 생명력, 아들과의 관계를 품어낸다. 오오모리 타츠시는 한 인터뷰에서 "아키코와 슈헤이 사이에는 동물같은, 기묘한 육체적 소통이 있다"고도 이야기했는데, 여기엔 '동물로서의 엄마'가 있다. 아마도 몇 번이나 추락했을 이야기가 두 시간 넘게 이어질 수 있는 건, 분명 이런 '엄마', 우리가 모르는, 혹은 보지 못했거나 않았을 '엄마의 품' 덕분일 것이다. 오늘도 수도없이 슈헤이와 아키코를 지나치며, 그래서 우린 누구도 그들을 탓할 수없다.
'도 아니면 모'인 영화들에서, 이야기는 종종 현실을 잊게할 때가 있다. 하나는 너무 뻥같아, 또 하나는 너무 초현실이라. 펠리니의 '길'이 삶을 은유하는 것처럼, 이창동이 '버닝'에서 트럭 옆으로 새어나오는 담배 연기를 비추며 시작부터 영화를 현실 너머로 데려갔던 것처럼, 고작 두 시간 남짓의 영화는 그렇게 잠시 이곳을 벗어나 수많은 상징을 경유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글로 쓰여지지 않는 의미를 남긴다. 하지만 오오모리 타츠시의 영화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일일시호일'이 키키 키린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이곳에 '시작의 죽음'같은 메시지를 새겨 놓았지만, '마더'와 마찬가지로 17살의 신인 배우 YOSHI가 주인공을 맡았던 '바보 타로'는 이름조차 갖지 못한, 부모에게 철저히 소외당한 소년의 삶을 그리면서도 버려진 채로, 망상과 환상의 강물에서 구하지 않았다. 애초 바라보는 세계의 방향이 다르기에 그곳에 정답같은 건 없다. 오히려 오오모리 타츠시는 수많은 이야기, 말, 소위 문명이란 것들, 아동 문제라면 학대와 방치, 약자의 처지를 핏대 세워 성토하는 대신, 이곳에 그려지지 못했던 어쩌면 동물같거나, 때로는 비열한 인간의 뒷모습, 심지어 바닥까지 헤짚어 들여다본다. 그게 엄마이든, 모성이든, 또는 우리가 신성시하는 죽음과 삶이든. "전체의 조화보다는, 인간에게 닥쳐오는 무언가를 찍고 싶다, 이야기와 별개로 배우가 그 자리에서 반응하는 걸 쫓아가고 싶다는 감각이, 내 영화에 일관된 거라 생각한다." '마더'에서 인물은 슈헤이와 아키코 모자, 아키코에 빌붙는 비열한 남자 료(아베 사다오), 그리고 사회 복지 직원인 타카하시(카호), 이렇게 세 분류로 나뉘고, 아키코 모자는 어찌보면 사회가 규정하는 선과 악, 그 사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해 배회하는 비현실의 형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카하시가 슈헤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순간, 아키코는 그렇게 세상이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을까. 나의 세계가 토막나는 순간. 보이지 않던 세계가 삭제될 때, 나 자신도 지워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