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가벼운, 그리고 리얼한. 이마이즈미 리키야 今泉力哉
이마이즈미 리키야(今泉力哉). 흔치않은 성에 발음도 간단치 않아 좀처럼 기억하기 힘든 이 이름이 이제는 얼추 무리없이 흘러나오는 건, 그저 근래 누구보다 눈에 띄는 '이마이즈미 감독의 '열일'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좀 생소하지만, 이마이즈미 리키야는 지난 해와 올해 각각 두 편씩, 2021년에도 두 작품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국내에선 올해 퀴어 영화제에서 공개됐던 'his'가 일본에서 상영중일 때, 다음 작품 '마을 위에서(街の上で)가 에고편을 공개했고, 마츠자카 토오리, 나카노 타이가가 주연한 이마이즈미 감독의 열 네번째 영화 '그 무렵(あの頃。)'은 전작이 개봉을 하기도 전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코로나가 극장가를 강타한 탓에 이런 말들이 좀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마이즈미 리키야는 지금 가장 일본의, 그리고 오늘의 도쿄를이야기하는 감독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나 이시이 유야처럼 날것이거나 품이 넓지도, 오오모리 타츠시와 하마구치 류스케처럼 실험적이지도 않지만, 그의 영화엔 지금의 도쿄, 그리고 일본에 흘러가는 가장 아무렇지 않은 하루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때로 내가 아는 도쿄를 만난다. 사람에 새겨지는 도시, 그런 사사로운 일상. 이마이즈미는 도시의 계절 이야기를 한다.
영화란 종종 참 수상하다 느끼지만, 이곳을 떠난 누군가의 아직 보지 못한 새 영화는 새삼 현실을 술렁이게 한다. 이미 3년 전 키키 키린이 세상을 떴을 때, 사람들은 오오모리 타츠샤의 '일일시호일'이 유작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시간이 더 흘러 키키의 영화는 두 편이나 더 공개되었다. 그리고 고작 얼마 전 미우라 하루마의 비보가 들려오고 그의 영화는 무슨 영문인지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개봉을 앞두고 있던 코미디 사기극 '컨피던스맨 JP 프린세스 편'이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지난 9월 공개됐고, 12월 11일에는 '텐가라몬(天外者)'이란, 조금은 상념에 젖게하는 제목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도 했다. '텐가라몬'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라는 뜻. 영화는 막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반까지 사무라이 정신과 기업가로서의 명석함을 두루갖춘 인물 고다이 토모아츠의 활약상, 근대 일본 경제의 기반을 다졌던 날들에 픽션을 가미한 오리지널 스토리다. 물론 주인공 고다이를 지금은 이곳에 없는 미우라 하루마가 연기한다. 지난 주 열린 영화의 무대 인사에서 함께 연기를 한 미우라 쇼헤이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미우라 군은 분명 저기 어디 있을텐데, 쑥스러워서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에요."라고 말했는데, 이미 끝나버렸지만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간. 미우라 하루마의 미개봉 신작은 아직 두 편이나 더 남아있다.
이마이즈미 리키야와 미우라 하루마. 영화 한 편을 빼면 사실 별 다른 연이 있는 것도 아닌 두 사람을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건, 순전히 며칠 전 본 둘의 작품 '아이네크라이네나하토무지크'란 영화 때문이다. 제목부터 꽤나 험난하게 들리지만 단순히 독일어 타이틀을 그대로 일본어로 읽어놓았을 뿐. '하나의 작은 밤의 노래'란 작품을 둘은 3년 전 함께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도 아닌 건, 이마이즈미 감독의 영화는 늘 섣불리 마침표를 찍지않는 묘한 '뉘앙스적 문법' 위에 놓여있다. 국내에서도 개봉이 된 '사랑이 뭘까'에서 테루코의 바보스러움과 마모루의 나쁘지 않지만 이기적인 라이프 스타일은 대수롭지 않은 논쟁을 남기고 끝이났고, '멘즈 논노' 모델 출신의 미야자와 히호가 후지와라 키세츠와 LGBT적 사랑에 빠지는 'his'는 전형적 퀴어물의 갈등 구조에서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며 싸움을 피했다. 그리고, 원제 그대로 옮기면 외계어처럼 되어버리는 탓에 해석을 가해 적으면 '하나의 작은 밤의 노래'는, 결국 노래 한 곡, 사이토 카즈요시의 '작은 밤'으로 수렴되는 이야기기이기도 하다. 센다이 역 육교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남자와 그 앞을 지나는 사토(미우라 하루마)와 아키노(타베 미카코)와 이름 모를 너와 나. 남자의 노래는 뜨문뜨문 계속 이어지고, 이런 일상, 이런 하루에서라면 시간은 조금 둥근 모양을 하고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과 마지막이 아닌 무수한 스쳐감의 '오늘'들. 내가 흘린 '어제'를 누군가 줍곤하는 어떤 '하루.' 영화 속 그 날은 무려 10년의 세월을 넘는다.
영화는 좀 유치하다. 영화는 좀 빤하다. 영화는 좀 단순하고 때로 심하다 싶을 정도로 '메시지', 라기 보다 '대사'에 집착한다. 가령 '그날 마주한 게 OO라 다행이다'라는 대사가 이 영화엔 수차례 등장한다. 보통 같은 대사를 여러 명의 인물이 똑같이 딕션하는 예는 별로 없지만, '하나의 작은 밤의 노래'에선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위의 말을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의 쓰임에 맞게 읊조린다. 예를 들면 사토의 직장 상사는 출근길 떨어진 지갑을 주워줬던 상대가 지금의 아내라 '다행'이었고, 사토의 친구 오다(야마토 유야)는 사고쳐 임신을 한 게 지금의 아내라 '다행'이었고, 오다의 와이프는 예전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남편과 딸 아키코 둘의 조합이 나쁘진 않다'고, 조금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엔 이제야 알아차린, 혹은 알게되는,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깨닫는, 돌려 말해 당시엔 몰랐던 날들의 의미가 새싹 틔우듯 출현한다. 영화의 초반, 미용실에서 일하는 미나코와 사토를 교차로 보여줄 때 이야기는 둘의 '러브 스토리'로 흘러갈 줄 알았지만, 이내 카메라는 그 곁에 다른 남자와 여자를 따라가고, 그런 '스쳐감' 속에 지금은 알 수 없는 것, 맺어지지 않는 결말, 내일로 지연되는 완성되지 않은 '오늘'이 태어난다. 10년이나 동거를 하고도 결혼 앞에 망설이는 사토와 쉽사리 승낙하지 못하는 아키노는 그렇게 조금 어색한 저녁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영화인 탓에, 작은 밤들은 하나의 '맺음'에 도달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느 밤 한 조각은 어딘가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다. 스쳐감이 스쳐감으로 남는 것처럼. 어긋남이 어긋남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미우라 하루마는 지금 어느 밤길을 걷고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마이즈미 리키야는 근래 '다작'으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그를 수식하는 가장 유효한 수사는 아마 '오늘의 도쿄, 지금의 젊은 세대'에 빗대어 볼 때이다. 본래 개그맨을 지향해 요시모토 흥업에서 운영하는 NSC에도 입학하기도 했다는 이마이즈미는, 선배 개그맨의 조언으로 개그가 아닌 스토리텔링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데, 영화에 그런 유머의 센스는 보이지 않지만 말, 대사를 어루만지는 감각이 어딘가 익히 봐오던 극영화 속 리듬이 아니다. 보통의 시나리오라면 흘러가는 말로나 쓰였을 법한 부사나 형용사에 가까운 말들을 이마이즈미는 극 중앙으로 데려온다. '하나의 작은 밤의 노래'에서의 '~라서 다행이다' 뿐 아니라, 실은 그저 연인이 없을 뿐인데 '솔로 활동 중'이란 말이나, '계속 서 있는 일 힘들겠어요'라는 말에 '앉아있기만 하는 것도 힘들지만요'라는, 하나마나한 대화거나.
조금 부풀려 이야기해보면, 그의 영화엔, 만남이 되지 못한, 이별도 되지 못한 '스쳐감, 그리고 '어긋남'과 같은, 별 거 아닌 순간을 도시의 서사처럼 꾸려내는 묘한 '이어짐'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게 나에겐 가장 도쿄에 어울리는, 도시를 담아내는 꽤 그럴싸한 운율처럼 보였다. 늘 붙어있는 건 남자 1과 여자 2인데 정작 연애는 1과 3 사이에서 벌어지고, 잠깐 들른 편의점의 점장은 알고보니 주인공 못지 않은 인물이고. 그만큼 그의 영화는 일상 속에 있고, 삶 곁에 머물며 끊임없이 나와 너를 탐색한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라고 하던데, 지금 도쿄에 떨어진 오늘의 오즈랄까. 인생사 고뇌와 번민은 아니지만, 도시 밤하늘에 비친 말못한 너의 마음 속에 어쩌면 나의 내일이 시작한다. 수천만 도시 사람들의 무수한 스쳐감 속에서, 사토와 아키노 사이의 10년같은 세월과 함께. 도시처럼 가볍고, 그렇게 리얼한. 늦은 밤 어떤 영화가 '노래한다.'